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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19)논픽션 쓰기 -1.논픽션 기획과 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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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8일 토요일 한겨레 18쪽

논픽션은 정의 자체가 애매한 분야다.

애초에 '논픽션'이라는 명명과 분류 자체가 문학비평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20세기 들어서 미국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집계를 하면서 나왔다.

소설 같은데 소설이 아닌 책들을 한 데 모으고 거기에 '논픽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것이 '논픽션 문학'이라는 자의식으로 발전했다.

이름의 역사도 짧고 편의적인 분류에 기원이 있다 보니 오해가 많다.

심지어 문학이론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픽션이 아니면 전부 논픽션'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 규정을 받아들이면 논픽션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고, 관습적으로 불러온 대상과도 맞아떨어지지 않게 된다.

교양서적, 실용서적은 전부 논픽션인가? 사전이나 영어 회화책도 논픽션으로 봐야 하나?

나는 개인적으로 논픽션을 '소설 같은 구성이지만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 정의한다.

짜임새를 강조하고 내가 아니라 남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와 구분된다.

그리고 소설 같은 점에서 에세이와 구분된다.

그리고 소설 같은 이야기성을 중요하게 따진다는 점에서 일반 교양서들과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다.

세부 장르로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평전과 회고록, 체험기, 여행기,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 르포르타주 있겠다.

'소설 같은 이야기성'이라는 말을 다시 풀면 논픽션 문학에는 소설처럼 인물(주인공), 사건, 배경(현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논픽션 기획을 할 때 부터 이들 요소 중 부족한 게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공들인 글이 논픽션 문학이 아니라 단순한 보고서나 인터뷰 모음집, 따분한 논문처럼 보이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문사에서 대형 시리즈 기사를 낸 뒤에 이걸 엮어 책으로 펴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쉽게도 신문에서 기사로 접할 때에는 흥미진진했던 취재 내용이 책으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기사는 공짜로 읽을 수 있는데 책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거나, 기사 문장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긴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더러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주인공이라는 뼈대가 없다'는 점을 들겠다.

신문사의 시리즈 기사들은 대개 대상과 엄격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이고, 두괄식 형태다.

게재 순서도 주제에 따라 논리적으로 짜여 있다.

객관적이고,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만 읽어도 정연하게 이해된다는 장점도 있다.

반면 책으로 묶이면 책장을 넘길수록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생각도 짙어진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문학 독자가 몰입하는 대상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운명이 궁금해야 뒤를 확인하고픈 동력이 생긴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주인공이 대단한 풍파를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취재팀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기사를 위해 어떤 궁리를 하고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인터뷰이를 어떻게 섭외했는지, 현장에서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같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인간 드라마가 된다.

흔히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취재 기사를 모아 책으로 낼 때 기사에 미처 집어넣지 못한 사건과 현장에 대한 정보를 보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보다는 단행본 기획 단계에서 다른 방향으로 공을 들이면 어떨까.

취재 기자들 자신의 이야기를 넣는 것이 좋은 해법이 될 것 같다.

반대로 배경이라는 뼈대가 약해 아쉬운 책들도 있다.

여기서 배경은 저자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현장에 대한 스케치뿐 아니라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독자가 옆에서 보고 듣는 것처럼 꾸민 묘사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다.

인터뷰를 할 때에는 인터뷰 장소를 사진으로 찍거나 분위기를 메모해서 기록하자.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책이라면 발품을 팔아 현장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수백 년 전 사건을 묘사할 때도 적용되는 조언이다.

단 몇 줄이라도 글에서 현장 분위기를 전하면 그 효과는 놀랍다.

가능하면 모든 챕터에서 그런 현장감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픽션의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20회에서, 현장을 만드는 기법에 대해서는 21회에서 더 깊이 다루도록 해보겠다.

이번 회에서는 그 뼈대들을 고르고 세우는 방향에 대해, 즉 문제의식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문제의식을 한 줄로 풀이한다면 '무엇을 주장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취사선택해야 할 사건과 현장이 달라지고, 그 팩트들을 대하는 관점도 달라진다.

거꾸로 말하면 문제의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자잘한 에피소드는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책이 되고 말아 버린다.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다행이다.

안 좋게 풀리면 피상적이고 자극적인 디테일로만 가득한 나쁜 책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다소 동어반복적인 분류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문제적 사건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쓰는 논픽션을 '발생형 논픽션'으로,

그렇지 않은 무정형의 소재로 써야 하는 논픽션을 '기획형 논픽션'으로 부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수백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형 사고에 대해 쓴다면 기획형이 아니라 발생형이다.

백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논픽션을 쓰겠다면 먼저 문제의식을 아주 날카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 서 쓸 것인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 쓸 것인가?

사고의 원인에 대해 쓰겠다면 그 원인을 그 사회가 품고 있던 구조적 부조리에서 찾을 것인가, 안전관리 책임자들의 처절한 무능력을 탓할 것인가, 그에 따라 만나야 할 사람들, 가봐야 할 현장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이 아예 없다면 자극적인 현장, 눈길 끄는 발언만 찾게 되고 이는 싸구려 황색 저널리즘으로 이어진다.

이순신 장군부터 친일파나 범죄자까지 문제적 인물에 대해 논픽션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위대한 초인, 혹은 기괴한 괴물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인가, 어릴 때의 환경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가? 혹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까지는 그도 남과 다르지 않은 장삼이사 중 한 명이었을까?

어떤 각도로 문제의식을 지녀도 좋다.

그가 슈퍼맨처럼 태생 자체가 다른 존재라면, 그 유전자가 참으로 놀랍다, 굉장하다고 단순히 서술할 게 아니라 남다르지 않았던 그의 처지를 한번 상상해 보자.

그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고심하지 않았을까? 그가 남긴 기록, 주변의 증언, 현장에서 그의 고독과 고립감을 읽고 찾아보자.

이 인물은 자신이 뭔가 대단하거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예감했을까? 그 운명을 두려워했을까, 흥분하며 기다렸을까? 이런 정도로 까지 문제의식으르 닦아놓지 않으면 이 관점은 자칫 지루한 찬양가가 되거나 비난 일색이라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를 책을 낳게 된다.

기획형 논픽션도 마찬가지다.

밀레니얼 세대의 인터넷 하위문화에 대해 논픽션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인터넷 하위문화는 주류 문화권 밖에서 맹렬한 실험과 도전이 일어나는 거대한 용광로일 수도 있고, 기득권에 진입할 위사를 반쯤 포기한 아웃사이더드의 피난 공간 성격이 짙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젠더 갈등과 혐오 문화의 최전선일 수도, 새로운 참여민주주의가 피어나려는 가능성의 시공간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 단순하게 쓰면 얄팍한 트렌드 설명서가 되어버리고 만다.

엽기코드 다음 병맛 코드가 왔고, 어느 커뮤니티는 무슨 분위기이고, 다른 커뮤니티는 무슨 분위기고... 이런 책은 오래가지 못한다.

단행본 한 권을 지탱할 문제의식을 키우는 일은 물론 쉽지 않고, 지름길도 딱히 없다.

문제의식이 훌륭하다고 해서 저절로 논픽션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문제의식이 적절한 스토리텔링과 현장을 만나면 픽션과는 완전히 다른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바로 팩트의 힘이다.

아쉽게도 한국 출판시장은 논픽션 저자와 독자층이 얇고, 한국 문학에서 논픽션의 지분이나 전통도 강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모쪼록 이 연재가 논픽션 저자를 꿈꾸는 분들께 자극과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 나라처럼 논픽션 소재가 넘치는 곳도 드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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