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22) 퇴고하기, 피드백 받기

반응형

" 이 글은 2020년 8월 29일 토요일 한겨레 18쪽에 연재된 글입니다."

 

책을 쓰는 일이 시작부터 끝까지 다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퇴고 단계는 특히 더 그렇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친 단행본 한 권 분량의 초고는 저자의 에고를 응축한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거기에 날카로운 톱과 칼을 들이대 뼈를 잘라내고 살을 발라내야 하다니,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가끔 나는 퇴고를 잘하는 작가는 인생도 현명하게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글의 착상이나 취재, 집필과 달리 퇴고만큼은 인격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퇴고를 잘하려면 자기감정을 잘 다스리고 냉정해져야 한다.
참을성도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자신의 작업물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조언과 비판에도 귀를 열 수 있어야 한다.
인격을 단박에 그런 경지로 끌어올릴 수는 없겠지만, 퇴고의 요령은 그나마 몇 가지 있을 것 같아 정리해봤다.
작가 생활 초기에는 퇴고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어떤 원고는 너무 오래 붙들고 있던 통에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쳐다보기 싫었다.
어떤 원고는 진짜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 빨리 남한테 보여주고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떤 원고는 엉망진창이라 고칠 엄두가 안 났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원고는 이만하면 됐지 싶어서... 재미없는 퇴고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싶었다.
퇴고를 하지 않는다는 기인 작가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빛에 쪼들려 원고를 빨리 써내야 했던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천재들을 제외한 우리 절대다수의 글은, 고칠수록 분명히 나아진다.
조금 나아지는 게 아니라 아주 확확 나아진다.
(사실 도스토옙스키도 퇴고를 했더라면 글이 더 나아졌을 것이다.)
세 번, 네 번씩 퇴고를 해서 초고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 깨닫는 경험을 하면 이 작업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 힘을 믿자.
참고로 나는 요즘 퇴고를 다섯 번가량 한다.
주변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퇴고를 적게 하는 편인 것 같다.
하긴, 헤밍훼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39번 고쳐 썼다고 하니.
나는 첫 번째 퇴고를 할 때에는 이야기의 앞뒤가 맞는지 먼저 검토한다.
소설이라면 회수하지 않은 복선이나 캐릭터 붕괴, 설정 오류가 없는지, 비소설이라면 논지에 맞게 글이 전개됐는지, 어색한
대목이 없는지 살핀다.
문장을 다듬기 시작하는 것은 세 번째나 네 번째 퇴고할 때쯤에서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고를 묵혔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펼치고 검토하는 게 도움이 된다.
글을 썼던 과거의 나를 잊고, 내가 아닌 남이 쓴 글이라 여기고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라면 모니터상이 아니라 출력해서 살피는 것이 기본이다.
필요하다면 직접 읽어보면서 문장의 길이와 호흡을 점검해 보자.
자신만의 기준과 도구를 마련해 놓을 수도 있다.
내 경우 문서작성기의 기본 설정 상태를 기준으로, 한 문장이 세줄을 넘어갈 경우 무조건 손을 본다는 원칙이 있다.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닐 것이다.
내가 평소 쓰고, 또 추구하는 글의 스타일에는 문장 길이가 그보다 짧은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도입한 장치다.
그런 치침을 몇 가지 정해놓으면 어디를 먼저 고쳐야 할지 찾아내는 데 유용하다.
소설가라면 한 챕터의 분량이나 등장인물이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 늘어놓는 대사의 길이에 대해 최대치를 정해놓고 호흡을 조절할 수도 있겠다.

 


주장을 담은 책이라면 각 세부 주장 별 근거의 개수를 셀 수도 있을 것이고, 글의 논지를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실수가 뭔지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초고를 쓸 때 의존명사 ‘것’을 자주 써서 복문을 만드는 안 좋은 버릇이 있다.
나중에 퇴고를 할 때 어떻게든 ‘것’의 수를 줄여 보려 한다.
행동을 묘사할 때 ‘~하기 시작했다’라고 쓰는 것도 나의 나쁜 버릇이다.

그런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퇴고할 때라도 수정하려 애쓰고 있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를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고 고치는 식이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아무리 애써도 자기 원고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퇴고만큼은 기성 작가가 신인보다 훨씬 유리한 처지에 있다.

편집자의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는 편집자와 저자가 교정지를 2,3차례쯤 주고받는데, 이 과정에서 원고의 완성도가 크게 높아진다.

읽고 쓰는 일에 관심 있는 가족이 있다면 엄청난 행운이라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

예비 작가의 두툼한 원고를 기꺼이 읽어주고 솔직히 조언해줄 지인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가족이 편집자보다 더 낫다.

편집자는 작가의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싶어 종종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내의 조언을 받아 퇴고한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이 글도 아내의 피드백을 받아 작성했다.(여보 오케이?)

편집자든 배우자든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았을 때에는 차라리 받아들이지 않을지언정 절대 반박하지 말라.

물론 그러기 쉽지 않다.

처음에는 칭찬이 아닌 모든 언급이 공격으로 들리고, 상대의 독해력이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기성 작가 중에도 편집자와 감정싸움을 벌이는 사람이 은근히 있고, 나 역시 초짜 시절 그랬다.

지금도 원고의 흠결을 지적해주는 아내 앞에서 자주 얼굴이 굳어진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말하기 민망하지만,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내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조언에 분노를 표하며 대거리한들, 무슨 실익이 있는가? 왜 내 최고의 우군을 적으로 돌리려 하는가? 말로 상대를 반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글로 써서 원고를 보완하자.

특히 어느 대목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지적을 받았다면 그 부분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예비 소설가들이 모여 서로 작품을 돌려 보고 합평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 작은 자리에서 서로 인정 투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

어떤 글이 좋은 작품이냐에 대한 견해는 저마다 다를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의 인상 비평은 걸러 들으면 된다.

구체적인 논지와 문장, 표현에 대한 의견에 집중해서 좋은 약이라 생각하고 받아먹자.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의견을 낼 때에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구체적으로 말해주자.

전문적인 부분에서는 외부 감수를 부탁할 수 있다.

나는 장편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 초고를 쓰고 나서 탈북민 출신인 주승현 통일학 박사(현 인천대 통일 통합연구원 교수)와 

송홍근 <신동아> 기자에게서 각각 감수를 받았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감수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작가의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퇴고와 피드백받기에 대해서는 얼마간 각오가 서야 한다.

진지하게 글을 쓴 한, 두 가지 모두 글쓴이를 영원히 쫓아다닐 골칫덩이다.

아무리 글솜씨가 늘어도 초고는 언제나 엉성한 가건물이다.

논리적 구멍과 오타가 수두룩하다.

독자의 피드백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모든 작가의 평상심을 위협한다.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늘어나면 사무치게 아픈 비판도 따라온다.

어느 한 구석 모난 데가 없어질 때까지 원고를 맨들맨들하게 만들라는 얘기가 아니다.

누구도 욕하지 않는, 흐리멍덩한 책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의 조언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뾰족한 곳을 더 뾰족하게 깎자.

글은 날카롭게 깎되 마음은 온유하게 먹자.

욕을 먹어야 한다면 정확한 욕을 들어먹기 위해 애쓰자,

비판에 익숙해지자.

이 연재 제목이 '쉽게 책을 써서 돈 버는 법'이라면 이런 말 안 할 텐데, 때로는 군중의 공격에 맞서는 결기도 필요하다.

기실 위대한 작가, 아니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그렇게 자기 시대와 잘 싸운 사람들이다.

책이 금서로 지정된 이도 있고, 출판사를 구하지 못한 이도 있으며, 더 안 좋게는, 구금되거나 추방된 이도 있다.

예비 작가들의 용기와 건투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누가 뭐라 하건 작품은 정직하게 응답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