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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부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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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20대 초반, 중반이었던 그때

누군가와 함께 속초 동명항 방파제 등대를 걷고 있었다.

등대를 향해 걷고 있었고,

그 반대 방향으로 머리가 하얀 노부부 두 분이 두 손을 꼭 잡고 걸어오시는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나도 나중에 결혼해서 내 아내와 저 두 분처럼 다정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부부란...?

몇 십년을 살다가도 헤어지면 남이 되어버리는 사이인가.

어떤 통계나 과학적 근거로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시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주는 마음,

고마움과 감사함.... 항상 내편이고 네 편이라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면,

그 노부부처럼 두 손 꼭 잡고 나이를 먹어갈 수 있지 않을까.


 

"2021년 6월 10일 목요일 한겨레 20면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중년의 결혼생활 위기를 털어놨더니 이후 기혼의 동년배들이 모이는 자라마다

'위기 고백 대환장 파티'가 열렸다.

부부간 대화 단절 기간부터 '이혼 진행 어디까지 해봤니?'까지 내가 더 심각하다 또는 했다고 목소리 높이는,

'쓰잘데기'없는 위기 배틀이 벌어지곤 했다.

울분의 간증 시간이 끝나면 더 '쓰잘데기' 없는 대안 논의가 벌어졌는데 국가 공인 '졸혼' 제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결혼하고 10년이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혼인 계약 관계가 자동해지되고 더 유지하고 싶은 부부만 갱신 신고 같은 걸 하도록

하자는 거다.

한술 더 떠 갱신하는 커플은 남보다 잘 살고 있는 거니 부유세처럼 그에 대한 세금을 물게 해야 한다는 더 급진적이고

황당무게한 제안도 나왔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같이 사냐고 물을수도 있겠다.

남녀 커플과 4인 가족이라는 가부장적 관습이 빠르게 해체되고 이혼도 흔해졌으니까.

하지만 결정적인 사유가 없으면 살면서 가장 크게 벌여놓은 일을 간단하게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살다 보면 '결정적'의 경계도 날짜 지난 신문에 눌린 라면 국물 자국처럼 흐려진다.

그렇다고 자식에 대한 의무, 노부모에 대한 의무, 가정 경제에 대한 의무 등 공동의 의무만 남은 지리멸렬해진 관계를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고민도 떨어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누가 대신 정리해줬으면 하는 맘까지 생기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특권증처럼 정략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부모의 반대도 무릅쓸 정도로 활화산 같은 열정만으로 선택한 상대방과 

왜 남보다 못한 관계로 바뀌게 되는 걸까.

주례사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백년해로'는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넷플릭스 시리즈<님아: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를 봤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진모영 감독이 제작에 나서 6개국 현실 '백년해로' 커플을

각각 1년 동안 관찰한 다큐멘터리다.

보고 나서 깨달았다.

이것은 불가능한 가능이라는 것을.

출연 부부들은 궁핍이나 병 같은 장애물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을 정도로 따뜻하고 정이 넘쳤다.

한마디로 선량함 가득한, 어디서 누구와 살아도 잘 살 것 같은 성품의 소유자들이었다.

결국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천재 수학자처럼 타고나는 거라는 비관적 결론을 내리게 된 게

내 성격 탓만은 아니다.

기쁘게도! 많은 부부를 장기간 추적 관찰한 저명한 연구자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50대의 미국 기자가 중년 이후의 삶에 대해 전문가 취재와 본인의 체험, 다양한 실험을 녹여 쓴 <인생의 재발견>에서

톰 브래드버리 로스앤젤리스 캘리포니아대 심리학 교수는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격이라고 답한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지, 부정적인 감정이 적은 사람인지에 따라 결혼 전에 이미 결혼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연구자는 디엔에이(DNA)에 담긴 세로토닉 조절 유전자가 결혼생활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고 한다.

부모로부터 하나씩 물려받은 2개의 대립 유전자가 둘 다 짧은 사람들은 집안의 정서적인 분위기에 훨씬 취약하다고 한다.

잘못되면 조상 탓인 거다.

그렇다고 이제 와 유전자 조사에 나설 수는 없으니 현실적인 조언을 원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스트레스 상황에 처한 배우자에게)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모든 게 괜찮아질거라고, 당신은 늘 그의 편이라고

말해주는 거지요. 그러면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겁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조언이라 거부감이 들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차마 어깨에 팔을 두르지도, 늘 당신 편이라고 말해주지도 못하는 옹졸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육아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손님'전략을 변칙적용해 극한의 갈등 상황을 모면한 적은 있다.

여성학자 박혜란은 한 육아 조언에서 "아이를 20년 동안 우리 집에 머물다 가는 '손님'으로 여기라"라고 당부했다.

손님은 나에게 조금만 잘해줘도 고맙고, 뭘 해라 하지 마라 요구하기 어려우니 심리적 거리가 생겨 아이를 차분히

지켜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거다.

배우자 역시 심리적 거리감을 가지고 뭔가를 알아서 해주겠거니, 당연히 해줘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고 대하면서 

분노도 실망도 잦아드는 경험을 했다.

결국 내가 아닌 사람은 자식이든 배우자든 개별화된 인간이라는 생각만이 관계를 유지하는 열쇠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답안지를 쓰다 만 느낌이다.

자식과 다르게 배우자는 원래 남이었는데 남을 남처럼 대하면서 잘 지내면 그게 부부인가?

그렇다면 켜켜이 감정 쌓인 난 말고 다른 남과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수천쌍의 배우자를 연결한 어느 매칭 사이트에서 선택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 수년간 유명한

수학자와 컴퓨터 과학자까지 동원해 예측모델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사랑의 활화산에 뛰어들 때 한줌의 재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예약 설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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