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말글살이

말글살이 - 과잠 옷은 입이 없는데도 말을 한다. '나, 이런 사람이야!' 머뭇거림도 없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옷만 말하는 게 아니다.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자신의 취향, 직업, 습관, 가치관을 말한다. 옷은 말을 빼닮았다. 선택하기와 배열하기, 말이 여러 단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주어 목적어 서술어'라는 순서에 맞춰 배열하듯이, 옷도 상의에 맞춰 하의를 고르고 양말과 신발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말에 메시지가 담기듯, 옷에도 메시지가 담긴다. 오늘은 경쾌하게, 오늘은 단정하게, 오늘은 자신감 넘치게, 오늘은 슬프게, 오늘은 섹시하게···옷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침마다 '드레스 코드'를 정하는라 시간을 보내지. 요즘엔 대학을 불문하고 학과 점퍼, 일명 '과잠'(꽈점)을 많이 입고 다니더라. 이유를 물어보니, '.. 더보기
밀글살이 - 각광 영어 '풋라이트'(footlight)를 직역한 말인데, '무대 앞 배우의 다리(脚)쪽에서 얼굴을 향해 쏘아 올리는 조명(光)'이다 보니 배우에게 시선이 쏠릴뿐더러 그림자도 거인처럼 길게 늘어져 연극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제격이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도 '각광'과 비슷하다. 각광의 사명은 무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모든 걸 비추는 건 각광이 하는 일이 아니다. 각광은 배우에게 '당신은 단역이 아니라 주인공이다'라고 속삭인다. 말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다. 선택 없는 말하기는 없다. 말하는 만큼 사건과 기억이 드러나지만 그만큼 버려지고 잊히는 것이 많다. 말은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그런 점에서 말은 현실에 앞선다. 평범한 사람이 무대 조명을 받는 경우가 드물듯이 .. 더보기
말글살이 - 말은 행동이다 언어학적으로 '언행일치'라는 도덕률은 잘못된 표현이다. 뱉은 말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는 뜻의 이 말은 마치 말과 행동이 따로따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말 자체가 뭔가를 하는 '행위'이다. 말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타자가 중견수 쪽으로 희생 플라이를 쳤다고 치자. 중견수는 공을 잡자마자 홈을 향해 힘껏 송구한다. 3루 주자도 돌진한다. 포수와 주자가 동시에 부딪친다. 관중은 '세이프'라고 외치지만, 심판은 '아웃'이라고 선언한다. 수만명의 관중이 한목소리로 '세이프'라 외쳐봤자 소용없다. 둘 다 의견을 표현한 것이지만, 심판만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때 '아웃'이라는 심판의 말은 그 자체로 행위이다. 주례가 '지금부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거나, 부모.. 더보기
말글살이 - 도돌이표 해방 직후 음악가들은 한자어로 된 음악용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자주 써서 그렇겠지만,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잇단음표, 으뜸음, 딸림음' 같은 말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고음부기호, 저음부기호, 연음부, 주음, 속음'이란 말에 비해 더 정겹고 음악적이며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은 '도돌이표'.('되돌이표'나 '반복기호'라는 말이 있지만 자주 쓰지 않는다.) 악보에서 노래의 어떤 부분을 되풀이하여 연주하거나 노래하라고 표시해 두는 기호인 이 말은 참 신통하다. '되감다, 되묻다, 되살리다, 되새기다, 되찾다, 되팔다, 되풀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도로'나 '다시'의 뜻을 갖는 접두사는 '되-'이다. '도-'라는 접두사는 없다. 그런데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 더보기
말글살이 - 약속 아이는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기대했지만 엄마는 그림책을 사 주었다. 시무룩해진 아이를 보며 엄마는 약속한다. "다음 생일엔 자전거 사 줄게." 아이는 이 말을 믿고 분을 삭인다. 약속은 말하는 사람이 청구하는 구속 영장. 자신을 옭아매는 포승줄. '봄볕이 참 좋다' '이 옷 마음에 들어' '창문을 열라'처럼 감상과 진술과 명령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말이 내 밖의 무엇에 대한 표명이라면, 약속은 나를 겨눈다. '지킬 거야, 어길 거야!' 약속은 취약하다. 약속은 지그 ㅁ하지만 그 이행은 늘 미래의 일. 말과 행동 사이에 놓인 이 '시간차'는 우리를 쉽게 '약속 파기'로 이끈다. '맹약'이니 '굳은 맹세'니 하며 요란을 떨고, 그것도 모자라 연대 보증을 세우고 담보를 설정하고 서약서를 내밀어 봤자 약속 이행.. 더보기
말글살이 - 소용돌이 이 허무맹랑한 세상에서 어찌 술을 멀리할 수 있으리오. 소주를 맛나게 마시는 법을 알려주지. 병을 한손으로 그러쥐고 9시 방향에서 6시 방향까지 튕겨주었다가 재빨리 제자리로 돌어오면 병 속에 휘리릭 하얀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독성은 옅어지고 술맛을 살아나게 되나니(말짱 거짓말이다), 옹색한 술상이 잠시나마 활기를 띤다. 허세를 즐기는 애주가는 두어번만 해 보면 익힐 수 있는 잡기 중 하나다. 술병 속 소용돌이이라, 해로움이 없다. 그깟 병 속의 소용돌이야 덧없는 놀이이지만, 강이나 계곡에서 휘어 감기는 소용돌이는 무섭다. 철부지 때 여름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갔더니 친구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쉬쉬했지만 소용돌이에 휩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용돌이의 힘은 중심을 향해 모든 걸 빨아들이는 게걸스러움에.. 더보기
말글살이 - 한소끔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했다. 가난뱅이 손에 쥐어진 식재료가 마르고 앙상한 것밖에 없어서였겠지만, 그걸 입에 맞게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엄마에게는 없었다. 싼 물엿으로 조린 멸치볶음은 늘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 있어서 씹을 때마다 입천장을 찔렀다. 김치는 짜고 질겼고, '짠지'는 짰지만 물컹했다. 철 지난 자반고등어는 가시만 많고 살은 적어 성마른 젓가락질을 하다 보면 목에 가시가 자주 걸렸다. 소풍날 김밥은 진밥 때문인지 싸구려 김 때문인지 늘 터져 있었다. 특히 엄마가 잘 못 만드는 음식은 시금치나물이었다. 봄철 별미인 시금치나물은 시금치를 적당히 데치는 게 관건이다. 한소끔 끊어오를 때 불을 끄고 바로 건져내야 사각사각 씹히는 맛을 살릴 수 있다. 엄마는 시금치를 데치면서 한눈을 팔다가 때를 놓.. 더보기
말글살이 - 일머리 말은 돌려쓰기의 달인이다. 일인다역이자 팔색조, 망치 없는 집에 돌멩이가 망치 노릇하듯, 단어 하나에는 뜻이 여럿 들러붙어 있다. 단어 '머리'의 쓰임을 볼작시면, 그 변신술이 신통하다. '머리 숙여 인사한다'에 쓰인 머리는 눈, 코, 입 포함 목 윗부분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다'에서는 머리카락이 난 부분만 가리킨다. 코를 만지며 '머릴 쓰다듬는다'고 할 순 없다. '머리를 자르다, 깎다, 기르다'는 머리카락을 뜻하는데, '머리통'(head)과 '머리카락'(hair)을 나누는 서양인에게는 '교수형'이 떠오르리라. 머리카락의 상태나 '양'(!)에 따라 '더벅머리, 곱슬머리, 생머리 , 대머리' 같은 말을 쓴다. 머리통 속의 내용물('뇌')을 가리키기도 한다. '머리 아프면 두통약 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