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말글살이

말글살이 -랍시고 말에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시하는 장치가 항상 있다. 싫은 티를 내는 장치가 빠질 리 없다. 그중에서 ‘-랍시고’처럼 말하는 사람이 ‘나는 너의 행동이 정말 맘에 안 들어!’ 하며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미도 드물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자격’이 있는지를 따진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가?’ ‘-랍시고’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는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쓴다. ‘-랍시고’ 앞에는 자격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명사가 오는데, ‘가수랍시고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식이다. 가수라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하는 행동(노래)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정치인, 연예인, 경제인, 교육자···,아니 이.. 더보기
말글살이 - 말 그대로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혼자 배실배실 웃을 때가 있다. 삶이 허하고 웃음이 부족한 사람에겐 직방이니, 나를 따르라. 간단하다. 말을 만나면 '말 그대로'의 뜻을 생각해 보는 거다. 이를테면 옷가게에 있는 '탈의실' 앞에서 '말 그대로'의 뜻을 생각해 보는 거다. 말 그대로라면 '옷 벗는 곳'이니 안에 들어가 옷을 훌러덩 벗고 나서 벌거벗은 채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어코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사람들 참 말 안 듣는다!). 왜 '탈의실'에서 옷을 벗을 뿐만 아니라, '입기'(착의)까지 하냔 말이다. 어디 탈의실만 그러겠는가. '떡볶이'는 말 그대로만 보면 '떡을 볶은 음식'이다. '떡볶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호기롭게 이 음식을 만들겠다며 프라이팬에 .. 더보기
말글살이 - 밥맛 '밥맛'은 밥에서 느껴지는 맛이다. '장맛'이 장의 맛이고, '물맛'이 물의 맛이듯이, '밥맛'의 뜻도 쉽고 뻔하다. '밥맛이 좋다'는 밥을 씹을 때 느껴지는 맛이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뭐든 가까이 있으면 물들기 마련인가 보다. 밥에서 느껴지는 맛은 밥 먹는 사람의 의지로 옮아간다. '밥맛이 당기다' '밥맛을 잃다' '밥맛이 떨어지다' 따위에 쓰인 '밥맛'은 밥(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나 의지를 뜻한다. '식욕'과 비슷한 말이 된다. 이런 쓰임은 '입맛'과도 통한다('입맛'은 '입에서 풍기는 맛'은 아니다. 그건 '입냄새'!). '입맛'은 음식이 입에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맛에 대한 감각인데, 그 감각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의지로 쉽게 바뀐다. 그러다보니 '밥맛이 없다, 입맛이 없다, 식욕이 없.. 더보기
말글살이 '기타' 내 방은 왜 이리 어지러운 건가? 오늘도 책 한 권을 찾느라 반나절을 보냈다. 남들은 정리정돈을 잘만 하던데, 내 방은 책 위에 책이, 책 뒤에 책이, 층층이, 칸칸이,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언젠가 읽겠다며 사 모은 철학, 교육, 사회, 예술, 문학책들이 전공책들과 함께 뒤엉켜 있다. 거기에 지난주 회의 자료와 주전부리, 세 갈래로 쪼개진 거울, 탑이 된 과제물들, 수북이 쌓인 볼펜과 우산 몇 자루, 낡은 온풍기,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들. ('기타' 잡동사니가 '나'의 습성을 말해준다.) 이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분류하고 모두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라만상을 어찌 인간적 기준으로 완벽하게 구획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열거하기 어려우면 '그 밖', '그 외', '나머지'란 뜻으로 '기타'를 쓴.. 더보기
말글살이 '그냥' 영화 '파묘'에 나온 '그냥 부자'란 말이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냥'은 철학적 무게가 느껴지는 부사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뭉뚱그려 말해 '그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있지 뭐." "이거 저쪽으로 옮길까?" "아니, 그냥 그 자리에 둬." 변함없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라는 뜻이 있다. "어쩐 일로 연락을 했어?" "그냥." "왜 날 좋아해?" "그냥 좋아." "그 일을 왜 하는가?" "그냥 한다오." 복잡한 계산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사랑과 우정과 환대의 세계는 반대급부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그냥'의 공간이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공간. 하지만 이 말이 '그냥.. 더보기
말글살이 - 부정문의 논리 캬, 이 기발한 문장을 떠올리고 나서 얼마나 안도했을까. '오염수 방류의 계획상에 과학적 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찬성 또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줄여서 '문제는 없지만, 찬성하는 건 아니다.'라는 부정문은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가 아니다', '~이지 않다',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그건 아닌 모든 가능성을 허용한다. 세상사가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뉘지 않으므로. '너를 싫어해' 대신 '너를 좋아하진 않아'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너를 존경해' 또는 '너를 사랑해'라는 '반전'을 꾀할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길수록 나는 안전해지고 책임은 옅어진다. 당신도 이런 적이 있을 거다. "옷이 너무 마음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