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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15.에세이 쓰기-2.왜 솔직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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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3일 한겨레 18쪽

 

젊은 기자들이 모이면 저마다 자기 출입처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과장하고 으스댄다.

그런데 사실 기자들조차도 다른 부서 출입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대화 자체가 잘 안된다.

왁자지껄하다가 결국에는 방송 연예 담당 기자에게 좌중의 관심이 쏠린다.

누구 만나봤어? 누구는 정말 예뻐? 무슨 루머는 진짜야?

정작 방송을 담당하는 기자 동기는 자기 일이 그다지 재미없다고 푸념했다.

기자가 화려한 스타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 제작 발표회나 시사회 같은 홍보 행사에서다.

스타들은 자신들이 딱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보여주고, 조금이라도 논란이 있을 만한 이야기는 삼가려 한다.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질문에도 "감독님께서 이러저러하게 설명하셔서 그러저러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식으로 자기

생각이 아닌 연출자의 의견만 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모든 질문에 그렇게 다 맥 빠지는 정답만 말하는 배우들이 많아. 기획사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거겠지. 일단 욕먹는 걸 피해야

할 테니. 그런 얘기는 한참 듣고 나도 기사에 쓸 내용이 거의 없어. '열심히 했으니 재미있게 봐주세요'하는 

말만 적을 수는 없잖아."

방송 담당 동기로부터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과연, 그런 면도 있겠구나' 하고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세상에 모든 면에서 정답대로 사는 사람만큼 따분한 인간도 없다.

사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기발한 생각, 독특한 태도, 남다른 의견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개성이며, 개성이 강한 이들은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우리 눈길을 끈다.

개성은 잘생긴 외모만큼 즉각적이지는 않아도 더 길게, 그리고 종종 더 깊이 사람을 매료한다.

에세이는 그런 개성이 핵심인 장르다.

다소 거친 설명이겠지만 '어떻게 하면 에세이를 잘 쓰르 수 있느냐'는 질문은 두 가지 과제로 쪼개어 살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특별한 생각을 발견하고 키울 수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생각을 잘 펼쳐 보일 수 있느냐'다.

전자는 다음 회에서 다뤄보기로 하고, 이번 회에서는 내 개성을 제대로 드러내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

많은 겨우 자기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는 욕을 먹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영화 시사회장에서 무대에 오른 배우와 같은 심정이 되기 때문인데, 이름을 알려야 하는 신인 작가(연예계 스타와는 처지가 매우 다른)에게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라 하겠다.

일부러 논란을 일으키거나 반사회적인 쇼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써낼 뿐인데 그걸로 욕을 먹는다면 먹는 거다.

좋은 에세이를 쓰려면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한다.

비판이 걱정된다면 자기 생각을 떳떳이 밝히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설득력 있게 펼칠 궁리를 하는 편이 옳은 방향이다.

그럼에도 논쟁거리가 될 사안이라면, 아주 좋은 글감이다.

아마 당신 편을 들 독자도 많을 거다.

솔직함을 막는 두 번째 요소는 자신을 치장하고 싶고, 뽐내고 싶은 욕심이다.

사실 아무리 오랫동안 수련한 종교인이라도 이 욕심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정도껏이다.

잘못하면 글이 화장한 초등학생 얼굴 같아진다.

어느 이름난 에세이 작가의 책을 읽다가 철학자나 소설가의 멋들어진 문장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튀어나와 

놀란적이 있었다.

세어보니 심한 경우에는 한 페이지에 다섯 문장이 남의 어록이었다.

꼭 필요한 인용도 아니었다.

 

 

'누가 이렇게 말했듯이, 누가 저렇게 말했듯이' 하고 뒤에 쓸 자기 생각을 꾸미는 용도였고, 맥락이 맞지도 않았다.

'나 이런 사람들이 이런 말 했다는 거 알아'하고 자랑하려는 심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읽는 나로서는 '이 작가는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의 대상이 지식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이나 예민한 감수성,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 아름다운 문장,

유머 감각일 수도 있다.

어느 방향이든 과하면 안 좋은 쪽으로 웃음거리가 된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을 때에는 사춘기처럼 누구나 이런 시기를 겪는다고 본다.

기실 그런 허영심이 글쓰기의 동력이기도 하다.

뛰어나 작가들의 담백하고 성숙한, 좋은 에세이들을 찾아 읽으며 그런 욕심을 슬기롭게 길들여보도록 하자.

특히 탁월한 에세이스트였고 엄청나게 많은 에세이와 칼럼을 쓴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추천한다.

이 책에는 오웰의 산문 29편이 실려 있는데, 책과 제목이 같은 에세이에서 오웰도 작가가 글을 쓰는 중요한 동기로 

허영심을 꼽는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웰은 같은 책에 실린 '정치와 영어'라는 칼럼에서 죽은 비유, 젠체하는 용어, 무의미한 단어 남용을 다양한 사례를 

들며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에세이를 잘 쓰는 법이 궁금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글이고, 또 자체로 좋은 모범이라 생각한다.

솔직함을 방해하는 세 번째 요소는 교훈과 감동에 대한 집착이다.

에세이는 교훈적이거나 감동을 줘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백일장에서는 늘 그런 억지 감동을 짜낸 작문이 상을 탔던 것 같다.

심사를 맡은 선생님들도 에세이란 그런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에도 모범생들의 수상작 낭독을 들며 '저런 틀림없이 뻥인데' 하고 느꼈다.

요즘 공허한 '감성 에세이'들이 그 잘못된 전통을 잇는 듯하다.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여성시대>(MBC)에서 실시하는 '신춘편지'의 심사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매년 봄 <여성시대>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짧은 에세이 공모전인데, 역사가 40년이 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심사위원을 맡았다가 청취자들이 보내온 온갖 고통스러운 사연들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가난, 가정폭력, 직장 내 괴롭힘, 투병, 한국 현대사에 얽힌 비극들, 아이의 죽음, 치매 가족 간병...

그런데 응모작 상당수가 마무리가 아쉬웠다.

진솔한 글줄을 인상 깊게 읽다가 끝에 가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을 학대한 가족에 대한 원망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장이 느닷없이 '그러나 지금은 상대를 용서했다, 

그곳 하늘에서는 편하신가요'라는 결말로 끝난다면 읽는 이가 누구라도 나처럼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글쓴이는 분명히 상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 '에세이는 교훈적으로 , 감동적으로, 착하게 끝나야 한다'는 부조리한 검열 기제가 작동하는 듯했다.

에세이에 결론이 있으면 좋다.

그런데 결론이 없어도 좋다.

상대를 원망하는 에세이도 나쁘지 않다.

'지금도 당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고 글을 마쳐도 된다.

그게 정직한 심정이라면 그렇게 마쳐야 한다.

감동을 받고 교훈을 얻은 일화가 있다면 그에 대해 쓰라.

그러나 갑남을녀 대부분은 그보다는 일상에 고통과 혼란을 느낀 적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혼란에 대해 쓰라.

괜찮다.

오히려 그런 고통과 혼란의 묘사에서 진솔한 에세이만이 줄 수 있는 뜻밖의 감동이 나올 수 있다.

글의 힘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정직하게 잘 쓴 글은, 거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뿐 아니라 그 글을 쓸 때 작가의 자세도 독자에게 보여준다.

내면의 고통과 혼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모습은 늘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어떤 미사여구도 거기에는 못 미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글의 힘은 참으로 오묘하다.

정확한 언어로 자기 안의 고통과 혼란을 붙잡으려 할 때, 쓰는 이는 변신한다.

그런 글을 쓰면 쓸수록 그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간다.

에세이 작가는 단어와 자기 마음을 함께 빚는다.

한번 그 맛을 알면 점점 더 솔직하게 쓰게 된다.

에세이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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