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연구로 알려진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환자들의 심리 변화를 5단계로 분석했다. 많이 알려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이다. 이 단계별 심리변화는 죽어가는 환자뿐 아니라 가족을 병이나 사고로 잃었거나, 연인과의 이별 등 다양한 상실의 감정에 적용되기도 한다.
지난 12월 3일 밤 이후 강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전 국민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에(PTSD)를 입은 뒤의 심리 변화에 대해서 생각한다. 계엄 선포 직후에는 공포였고 그날 밤의 사정이 속속 드러나면서는 분노가 대체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군장성들과 국무위원들이 "시켜서 했을 뿐"이라는 제목의 돌림노래를 부를 때부터는 분노에 허탈감이 뒤섞이더니 롯데리아 계엄모의와 버거보살이 등장하면서는 초현실적인 유머의 경지까지 치달았다. 내란사태 우두머리가 체포된 지금까지 분노와 허탈과 웃김이 뒤죽박죽이다. '조사에는 입 닫더니 도시락은 잘 먹어' 식으로 쏟아지는 기사 제목을 보며 빵 터진 다음 욕이 나온다.
이런 감정의 혼란 단계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떠오르는 건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에서 체포되지 않기 위해 경호처 직원들에게 범법자가 되더라도 자신을 보호하라고 지시했고, 체포도니 뒤 조사받으면서 모든 불법 지시는 아랫사람들이 한 것이라고 떠넘기며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답변했다는 기사를 보고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조잡하고 황당한 콘텐츠를 봤을 때 부끄러움은 시청자 · 관객의 몫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부끄러움이기도 하지만 그냥 나잇살 먹은 중년의 한 인간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사람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갈수록 칼럼을 쓰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갈수록 좋은 어른이 되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생각에 가까워져서다. 좋은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처럼, 좋은 젊은이가 그냥 좋은 늙은이가 될 뿐이다.
하지만 원래 품성이 그닥 좋지 않았고 꾸준히 별로인 나라고 할지라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는 있다. 나이 먹어가면서 점점 늘어나는 후배들에게, 내가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에 나쁜 선배나 이웃이 되는 걸 피할 수는 있는 방법은 있다는 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쪽팔리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실행해야 할 프로젝트가 망했을 때 아랫사람을 가리키며 "쟤 때문에 망했어요"라고 핑계 대지 않은 것이다. 속으로야 억울한 게 한두 개가 아니고 절친 붙잡고 밤새도록 뒤담화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잇살 먹고 쪽팔리지 않으려면 내 감정의 구구절절한 속사정은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한다. 김누리 교수가 칼럼('문제는 윤석열이 아니다' 한겨레 1월 22일치)에서 언급한 '비겁-비열-비루' 3비 세트가 사실 윤석열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주 비겁해지고 비루한 욕망을 품으며 비열한 공격성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현하지는 않는다. 똥이 마렵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를 까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이를 먹었다는 건 그런 의미다.
내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한 사람도 아니다. 저 세상 수준의 막장 발언을 뿜어내는 종교인 앞에서 설설 기는 정치인들과 떠넘기기 게임의 치열한 두뇌 싸움 중인 고위 공직자들을 보면서 눈을 어디에 뒤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우울한 건 나잇살 먹고 번듯한 자리에 있는 이들의 이런 행동이 어떤 시그널이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다. 각자도생을 넘어 부끄러움 없는 '3비 세트'가 시대정신으로 세상을 잡아먹을까 두렵다.
작고한 작가 박완서는 1974년에 발표한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반세기가 지난 글이지만 많은 이들이 지금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