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잘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이 뭘까.
나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대상을 유심히 헤아리게 된다.
그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다.
좋은 에세이에는 그렇게 삶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애정이 담긴다.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에세이를 읽는 이유이고, 좋은 에세이를 읽고 나면 저자에게 호감을 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다르다.
틀림없이 좋은 소설인데 읽고 나서 저자에 대해 무섭다거나 불쾌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까.
훌륭하지만 섬뜩한 소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에세이는 읽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글을 쓰기 위해 마음 수양을 하거나 도를 닦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삶이라는 추상명사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의 부분집합이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곧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그 대상을 자세히, 오래 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그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과거에 있었다가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찾아보자.
어떤 면에서는 에세이를 쓰는 것 자체가 그 훈련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를 지녀야 좋은 에세이를 쓸 수 있지만, 동시에 에세이를 쓸수록 사람을 사랑하는
자세를 익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에세이를 쓰는 사회를 꿈꾼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다.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에세이에 꼭 사색과 철학을 더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물을 다정하게 관찰하고 희로애락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문장들만으로도 빼어난 산문이 된다.
신변잡기유의 글도 좋다.
하지만 거기에 글쓴이가 오랫동안 고민해서 발전시킨 독창적인 사유가 몇 숟갈 들어간다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나는 당신의 에세이에서 삶을 향한 애정뿐 아니라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도 읽고 싶다.
아쉽게도 우리의 글쓰기 교육이 그런 능력을 키워주는 것 같지는 않다.
논리력, 사고력을 키워준다는 논술 교육 대부분은 복잡하지 않은 주장을 한 시간 안에 서론-본론-결론의 꼴을 갖춰
써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대학 입시부터 입사 시험까지 논술 평가의 틀이 거의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독창적이고 참신하기보다는 무난하게 쓰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신문사에 다닐 때에는 언론사 시험에 붙는 법에 대해 기자 지망생들의 질문을 자주 받았다.
답부터 말하자면 양비론을 피하고 문제를 받자마자 결론을 정한 뒤 한 방향으로 빨리 쓰는 게 좋다.
몇몇 수험생들의 오해와 달리 사상 검증과는 관련이 없다.
시험 단계로 따지자며녀 초기 관문이며, 회사의 중역들이 채점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면접에 들어가면 원점 기반에서 평가한다.
잘 쓴 글을 골라내는 게 아니라 못 쓴 글을 걸러내는 용도란 얘기다.
이런 글을 '잘' 쓰기 위해 기자 지망생들은 논술 스터디를 만들어 대비한다.
논술 학원에서 글을 가르치는 방식도 비슷하다.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면서 갑자기 맞닥뜨린 주제로 깔끔하게 시험지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
서론을 지나 본론으로, 1번 주장을 펼치고 1번 근거를 쓰고, 2번 주장 다음 2번 근거, 3번 주장이 있으면 그것도
근거와 함께 쓰고 그 뒤에 마무리 짓는 결론....
그 짧은 시간에 복잡한 사유를 펼치려다가는 시간을 못 맞춘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글도 필요하다.
하지만 에세이는 그런 식으로 배울 수 없다.
에세이에 철학을 담는 법 얘기인데, 우리의 철학 교육은 어떨까.
간혹 십대를 위한 철학 입문서들을 훑다 보면 철학 책이 아니라 철학사 책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소크라테스가 뭐라고 말했는데 플라톤은 뭐라고 했고 데카르트는 어땠고, 칸트는 어쨌고...
대철학자들의 사상이 하도 어마어마한지라 그 앞에서 내 생각을 쉽게 펼치기는 어렵다.
심지어 그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과 반박까지 정리되어 있다.
시사 이슈를 놓고 벌이는 토론 교육도 그렇다.
대개의 이슈는 찬성과 반대 두 가지로 편리하게 분해되며, 각 진영의 의견은 검색으로 금방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그렇게 사회 현안에 문제의식을 갖는 게 나쁜 일은 아니겠으되, 어째 그 틀이 음식점에서 세트메뉴를
고른 것과 비슷해 뵌다.
특히 학생들이 세상 모든 일이 찬반 두 가지 옵션으로 나눠지고 이후에 정반합이라든가 다수결이라든가 심사위원단 판정으로 해법이 나온다고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늘 새롭고 엉뚱한 길이 있다.
때로는 해법을 내지 않는 게 해법인 경우도 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논설문을 쓰거나 토론을 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색가, 철학자가 될 기회가 생긴다.
사랑하는 대상의 여러 면을 오래 유심히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이상학적인 유추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구체적인 현실에서 추상적인 사고로 도약할 수 있는 존재다.
정규 교육을 하루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보고 듣고 겪는 일에 대해 속담을 적절히 인용할 수 있지 않은가.
어떤 인공지능도 아직 그런 일은 못 한다.
속담을 인용하는 걸 넘어서, 나만의 격언, 금언을 만들면 어떨까.
거창한 작업이 결코 아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누구누구 어록이 다 현대판 속담들이고 미래의 격언이다.
어떤 상황에서 인간 본성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남이 한 멋있는 말을 검색하기에 앞서
내가 짧고 굵게 표현해 보자.
애써 멋을 부릴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대상을 유심히 헤아리게 된다' 같은 단순한 문장이라도 좋다.
그런 일반화, 범주화 과정에서 저자의 사색과 철학이 담기게 된다.
요즘은 일반화와 범주화를 폭력적인 기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
일반화 과정에서 개인, 그리고 개별적 상황의 특수함을 놓치게 된다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반화, 범주화 없이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버스'라는 범주화된 개념이 없다면 낯선 사람이 운전하는 커다란 차를 어떻게 믿고 탈 수 있을까?
애초에 '일반화가 개별성을 희생시킨다'는 서술조차 일반화다.
속담 다음은 사전을 만드는 단계다.
여러 추상명사들을 나마의 방식으로 정의해 보자.
'맛있게 먹었다'에서 멈추지 말고 미식의 요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행복했다'에서 그치지 말고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써보자.
그러려면 인생의 풍미와 즐거움의 의미에 대해 잠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국어사전의 정의 얽매이지 말자.
어차피 사전의 설명은 편의적이고 임시적이다.
단어의 뜻은 계속 변한다.
나는 아내와 함게 했던 보라카이 여행기 <5년 만에 신혼여행>에서 '결혼의 핵심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선언에 있다'고 호기롭게 쓴 바 있다.
그 약속을 하는 연인의 성별이 같건 다르건 그런 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커플이 같은 집에서 몇 년째 함께 사는 사이라고 해도 '우리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거이지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을 얼마나 성대하게 치르느냐, 아예 예식을 올리느냐 마느냐 하고도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라는 설명과 다른, 나의 철학이다.
구체적인 단상이 추상적인 사고로 발전하려는 간질간질한 순간을 느끼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그 외에도 많을 것 같다.
어는 순간 찾아오는 막연한 기분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기, 책이나 영화에 대해 오독을 겁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기,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게 가상으로 변호사를 붙여주기, 내 안의 야당과 대화하기 등등.
중요한 것은 그 서사에서 주인공 자리에 내가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이론이라든가 한민족의 미래 같은 것이 아니라.
나는 뇌에도 일종의 근육이 있지 않나 상상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역시 에세이를 쓰는 것 자체가 그 근육을 키우는 훈련이라고 믿는다.
사색을 자주 할수록 사색하는 힘이 커지고, 에세이를 쓸수록 나만의 철학이 딴딴하게 영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