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 (13) 양산의 햇살 좋은 우리집

반응형

 

신문을 읽다,
공감이 되는 글이 있어 올려 봅니다.
집이야 말로.... 이래야 되는 것 아닐까요....?


2020년8월 15일 토요일 한겨레 11쪽

내가 가진 첫번째 집에 대한 판타지는 ‘싱크대’였다.
겨울만 되면 마당 한가운데 있던 수도가 꽝꽝 얼어 터지는 경기도 파주의 달동네 꼭대기 집.
어린 시절에 나는 11월이면 수도꼭지를 양말로 돌돌 매는 엄마를 보고 자랐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하던 일을 고스란히 해야 했던 나는 외부에 수도 시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양옥집에서 사는 아이들은,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집 안에서 물을 떠먹고 산다는데.
학교가 끝나면 내가 사는 달동네로 올라오지 않고 주공아파트가 있는 읍내로 향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마당 한가운데 수돗가에 매달려 손을 호호 불며 쌀을 씻고 빨래를 했던 어린 나는 그 래서 겨울만 되면 손가락 열개가 빨갛게 얼었는데, 이불 밑에 손을 밀어 넣으면 저릿저릿 살 속으로 밀려드는 따가운 온기에 눈물이 핑 돌곤 했다.
몇 년 뒤 유난히 넓기만 했던 마루에 문을 달고 비닐로 모두 막아 연탄 난로를 놓고서 마침내 수도를 집 안으로 들이는 공사를 했을 때, 실내에서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 앞을 한참 서성거렸다.
다시 물을 틀어보고 또 틀어보며, 그날은 연탄난로 앞 두칸짜리 싱크대가 나의 천국이었다.
집을 나오고 월세살이를 시작하면서, 집은 판타지를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손바닥만한 월세방에는 꿈이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믿었다.
워낙 가난했고 또 불안ㅇ르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삶이다 보니, 20대 시절은 온통 피로뿐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꿈을 꾸고 살까, 가족이든 성별이든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꿈꾸는 일은 원래 가능하지 않은 걸까.
나는 슈퍼싱글 침대 하나를 놓으면 꽉 차는 단칸방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의 근원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물론 답은 없었다.
이불을 싸안고 드러누워 찾을 수 있는 해답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학원에서 일을 얻고 보즈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갖게 된 집에 대한 판타자는 ‘통창’이었다.
집이 좁아도 좋으니까, 방이 몇개 없어도 괜찮으니까, 밖으로 환하게 열린 통창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직장인들을 위한 주거용 원룸이라는 것이왜 꼭 그래야 하는 것지 모르겠는데, 대부분 창문은 너무 작았고 통창이라고 해봐야 앞 건물의 옥상이 보였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담배 연기가 곳곳에서 흘러들었다
창이 있었지만 창을 열어도 연 것 같지 않았고, 짐을 넣을 곳이 없어 이사 갈 때마다 버릴 것을 염두에 두고 가장 싸고 허름한 물건을 골라야 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집이 아니라, 집을 위해 나의 생활에 맞춰졌다.
집 하나가 내 삶의 전부일 리 없는데, 집이 좁으니 생각이나 마음도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원룸 생활을 벗어난 것은 양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였다.
가난한 글쟁이의 벌이는 여전히 ‘오백에 삼십’살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시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다행히 그 정도 월세로도 얻을 수 있는 집이 있었다.
공단 옆이었고 아파트는 낡았지만,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산의 풍경이 너무도 좋았다.
통창을 가득 채운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데, 산자락에 걸린 저녁 해를 볼 때마다 혼자서 탄성을 질렀다.
남서향의 18평짜리 아파트는 겨울이 되면 길게 해가 들었는데, 베란다에 의자 하나 놓고 앉아 햇볕을 쬐는 일이 그렇게 좋았다.
집에 대한 내 마지막 판타지가 바로 그 ‘햇살 좋은 집’이었는데, 마침내 이루어진 것 같아 너무도 좋았다.
그 나이 먹고 월셋집을 벗어나지 못한 채 겨우 그까짓 것이 행복이냐고 누군가는 놀리겠지만, 햇살 속에 앉으면 왜 그렇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던지.
2천원짜리 접시에 쿠기 몇 개 올리고 커피잔을 들고 앉으면, 베란다 창 너머 산과 마주한 채 온종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팔자 좋아졌구나, 혼자서 피식피식 웃곤 했다.

 


월셋집마저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마흔다섯, 신랑과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였다.
신랑이 직장 생활로 모은 돈과, 내가 가진 돈과, 약간의 돈을 빌려 작은 아파트 하나를 마련하게 되었다.
24평 아파트의 매매 가격은 9천만원 중반이었다.
1억 원이 되지 않았다.
양산에서도 외곽이었고, 내가 월세를 살던 동네인 공단 지역의 아파트였다.
혹시나 더 괜찮은 매물이 있을까 몇 달 동안 양산 전역의 아파트를 뒤졌지만, 가격이 맞으면 아파트가 너무 오래되었고, 어느 정도 괜찮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아파트였다.
욕심을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신랑이나 나나 불안에 취약한 사람이었고, 그 정도면 우리 두 사람에게 충분하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모두에게 맞는 집이 곧 우리 두 사람에게 맞는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일, 우리 너무 빨리 갖게 된 우리 집에서 셀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어떤 판타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삿날을 며칠 앞두고 전에 살던 사람의 짐이 모두 빠지고서,나는 우리가 이사 갈 집에 들어가 보았다.
밤에만 와서 보았던 터라 걱정이 되었는데, 낮에 본 집은 훨씬 더 환하고 밝았다.
작은 아파트 단지에 우리가 사는 동만 방향이 달라 앞뒤로 막히는 건물도 없었다.
베라다 창과 주방 너머 다용도실 창을 열면 맞바람이 들어 순식간에 환기가 되었고, 동남향인 덕분에 여름엔 해가 물러나고 겨울엔 거실 깊숙이까지 해가 들었다.
나는 그날 멀리 양산 시내까지 보이는 탁 트인 베란다 창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갔다.
‘잘 부탁한다, 잘 살아보자.’ 아파트의 모든 벽을 쓰다듬고, 선반의 문을 열어 인사하고서, 현관 앞에서 손까지 흔들고 돌아섰다.
인테리어는 처음부터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전 입주자는 직장을 다니며 잠만 자던 싱글이었고, 10년이 훨씬 넘은 아파트였지만 너무도 깨끗했다.
거실 한쪽만 도배를 했고, 화장실만 수리를 했을 뿐이다.
주방에는 기다란 식탁 겸 작업 테이블 놓았고, 둘 다 영화를 좋아하기에 벽에 65인치 티브이를 새로 달았을 뿐 나머지 물건은 개 쓰던 걸 고스란히 가지고 왔다.
책이 많아 책장으로 쓸 선반을 조립해 놓았고, 팬트리에도 선반을 놓아 식자재를 정리했다.
옷가지는 각장의 방에 똑같은 오픈형 선반을 놓아 정리했고, 거실에는 너무 좁아 보일까 봐 소파 대신 1인용 의자 두 개를 놓았다. (1년 뒤엔 결국 소파를 들였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은 햇살이 드는 베란다.
나는 베란다에 크고 푹신한 안락의자를 놓았고 너무 뜨거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그곳에 앉아 하늘을 보며 산다.
이따금 하늘을 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미소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멀리에서 달려오는 소나기구름도 보고, 온 세상을 뒤덮는 황사 먼지도 본다.
햇살이 맑은 날엔 양산 도심 너머 산자락도 보이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모든 흘러가는 것들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조급하거나 불안해진 마음들로 겨우겨우 얻은 것들이,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티브이를 켤 때마다 집값 이야기가 온통 도배를 하는 요즘, 그래서 우리 아파트 집값은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았다.
그때도 이렇게 싼 방이 있을 수 있나 싶었는데, 어느새 더 내려갔다.
신랑과 나는 8천만원대가 되어버린 우리 아파트 가격 앞에 껄껄 웃고 말았다.
섭섭하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다.
우린 이곳에서 4년째 살며, 같이 책을 여러 권 냈고, 건강도 좋아졌으며, 좋은 일들이 참 많았다.
이웃들은 다정하고 품이 넓었으며 환하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신랑은 앞으로 몇십 년은 이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벌써부터 다짐하는 중이다.
나 역시 우리 두 사람의 집에 불만은 없다.
일 때문에 며칠 서울로 갔다가 돌아오는 날에는 저절로 ‘우리 집이 초고지!”외치게 된다.
언젠가 이 집과 헤어질 날이 올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저 햇살, 저 산자락, 저기 뿌옇게 마을을 뒤엎은 안개, 비구름.
오늘도 우리는 언젠가 그리워지게 될 그리움을 집 안 곳곳 새기며 산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