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발톱을 보았다. 무디고 느려 조롱거리로 전락했지만, 우리의 일상이 겨울 낙엽처럼 하루아침에 바스러져 버릴 뻔했다. 두려웠다. 그것은 공격형 헬기가 밤하늘을 찢어 버리고 신형 장비로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거리를 어슬렁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홧발에 짓이겨지고 총탄에 쓰러지는 시민들의 주검과 체포 구금되는 반대자들의 행렬이 그려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포'라는 언어 행위 앞에서 새삼 느껴지는 두려움이었다. "저는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선언을 들으며 엄습하는 무력감 같은.
비상계엄, 즉 '예외 상태'의 선포는 말의 극단적 폭력성과 모순을 드러낸다. 말 한마디로 폭력성과 모순을 드러낸다. 말 한마미로 모든 법을 폐지할 수 있다니, 법질서를 효력 정지시킴으로써 예외 상태가 된다. 법의 공백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헌정 질서'를 지킨다는 말로 정당화하는 비상조치가 헌정 질서를 몰락시키는 쪽으로 이끄는 역설적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철학자 조르조아감벤)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사기 치지 말라는 따위의 법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따라야 하지만, 비상계엄은 다르다. 법을 선포한 자는 그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능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걸 과시한다. 입법, 행정, 사법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 지배자 스스로 법의 테두리 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이 명명한 법의 이름으로 모든 국민을 지배하게 만든다.
멋대로 소환된 이 '비상한 상황'은 허깨비다. 눈에 보이기는커녕 선언되는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비상한 상황이 될 뿐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쌓아 올린 그 숱한 말들은 한 순간에 일그러지고 유린당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선포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