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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9소설쓰기-1.개요를 짜야 하나?(2020년 2월 22일 토요일 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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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소설, 에세이. 논픽션 책 쓰기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소설 쓰기부터 시작해본다.
소설가 지망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때 꼭 듣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작가님은 글을 쓸 때 미리 개요를 짜시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며, 나는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습작을 시작하고 2~3년 안에 찾아내는 게 좋다.
소설가 지망생들이 이 문제를 되풀이해서 묻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마다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기는 영매처럼 옮길 뿐이며,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기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소설가들이 있다.
반대편에 선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건 설계도 없이 건물을 짓는다는 말이나 마차가지라고 비판한다.
스티븐 킹은 개요를 짜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은 등장인물을 곤경에 빠뜨리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이며, 그래서 자기 작품의 첫 독자가

자신이라고 한다.
릭 무디는 소설의 구조는 작가가 미리 짜는 게 아니라 쓰면서 발견하는 거라고 한다.
반면 제임스 스콧 벨은 글을 쓰다 보면 플롯이 저절로 소설가의 머리에서 흘러나온다는 얘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반박한다.
소설가 지망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두번째 이유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시도해보아도 뭐가 나은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 써보자’고 마음먹고 되는대로 써 본다.
처음에는 진도가 잘 나간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곤란한 상황이 있고, 갈등이 빚어지고, 그러다 벽에 부딪힌다.
지금까지는 수월했는데, 이제 여기서 물 어쩐다? 여기서 포기하는 초보 소설가들에게는 도입부만 있는 원고가 수북이 쌓인다.
기성작가 중에서도 같은 곤경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잖아 뵌다.
시작은 그러싸한데 중간부터 갈등도 스케일도 쪼그라들더니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이 꽤 있지 않은가.
읽다 보면 작가가 개요 없이 자기 필력을 미고 일단 이야기를 벌였다가 수습을 못 해 애먹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특히 단편을 주로 쓰던 작가가 장편에 도전했을 때 이런 경우가 왕왕 생긴다.
반면 개요를 먼저 짜기 시작하면 아예 첫 문장에 손을 대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지기도 한다.
개요를 짜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으므로.
어떤 작법서는 그냥 유명한 작품의 플롯을 빌려 오라고 제안한다.
‘공식’에 맞춰 쓰라는 얘기다.
그런데 공식에 따라 쓰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원고를 마칠 수 없다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해 줄 뿐, 그 이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공식에 따라 글을 쓰면 쓰는 재미가 없다.
실컷 수다를 떨고 싶어 입을 열었는데 상대가 앞에서 끊임없이 “지루한데” “딴 애기 해”라고 말하는 기분이다.
자신이 기성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작업에 애정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진다.
어떤 이들은 ‘대중소설이나 상업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플롯을 고민해야 한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쓰려거든

개요를 짜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이런 조언은 얼마간 들어맞기는 하지만 정답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소설은 다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목표는 작가마다 다를 수 있다.
감동일 수 있고 재미일 수도 있고 논핀션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진실이나 통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머릿속에서 인물, 사건, 배경을 꾸며내고, 그것을 문장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든 소설가에 해당한다.
‘이 사고 실험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어떤 소설가가 되려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어진다.
진지하게 소설을 쓰려는 분들께 ‘위대한 소설가, 평단과 대중 양쪽에서 환영받는 소설가, 재미도 있는데 의미도
있는 소설가’라는 막연한 답을 넣어서 구체적으로 성찰해보길 권한다.
‘나의 장점은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꿔봐도 좋겠다.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완결하는 것은 힘든 작업이다.
소설가에게는 사고실험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엔진이 필요하다.
소설의 3요소를 주제, 구성, 문체라고 하고, 그중에서 다시 소설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 한다.
모두 중요하지만 그 요소들 전부를 동시에 사고 실험의 엔진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모두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요소로 추동력을 얻으면 다른 요소는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한번 스스로 물어보자.
나는 저 중에 어떤 요소에 대해 상상할 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잘 이어지는가?
내가 가장 끌리는 이야기의 성분은 무엇인가? 캐릭터인가, 플롯인가, 세계관인가? 혹시 나는 소설의 중심은
주제나 이야기가 아니라 문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허구를 통해 심오한 주제에 이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가?
널리 알려진 소설들이 위의 요소 중에 어떤 점에 무게를 두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롤리타>에도 플롯은 있다.
독자들은 롤리타가 과연 양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험버트 험버트가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보다 험버트 험버트의 내면이 작가 나보코프의 주된 관심 사였음은 명백하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지식인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추악한 욕망에 사로 잡힌

사나이를 중심에 둔 사고 실험이다.
그런 무게중심이 있었기에 원고를 써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쥐라기 공원>의 주인공 앨런 그랜트 박사는 소탈한 현장주의자에 아내와 사별한 아픔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한다.
이언 맬컴 박사는 까칠한 성격에 검은 옷을 즐겨 입고 과학기술에 비판적이다.
그들은 소설 캐릭터로 충분히 매력 있게 묘사된다.
그러나 작가 마이클 크라이턴의 관심사는 인물의 개성이 아니라 그들이 공룡한테 잡아먹힐지에 있다.
크라이턴은 인물의 내면보다 공룡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느냐를 더 고민했을 것이다.
그 고심이 쓰고 있는 대목의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배경이 집필의 엔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쓸 때 주인공 일행의 성격보다 중간계 종족의 특성과 역사 설정을
먼저 짰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썼을 때도 퇴보하는 제국과 미래를 예견하는 과학이라는
아이디어가 다른 요소들보다 앞섰을 거다.
해리 셀던이라는 학자 캐릭터를 구상하다가 그 사람이 역사 심리학이라는 가상의 학문을 만들어냈다는
식으로 발전했을 리는 없다.
사실 나는 소설가들이 어떤 요소를 창작의 중심에 놓았느냐를 놓고 소설 장르를 구분하는 편이 기본

분류법도다 훨씬 정확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순문학, 대중문학, 장르소설 같은 구분은 모호할 뿐 아니라 기이한 위계까지 낳는다.
그보다는 인물-문체 중심 소설(흔히 순문학이라 하는 영역과 겹칠 것이다), 사건 중심 소설 (추리, 로맨스, 스릴러),
세계관 중심 소설(에스에프, 판타지)이라는 분류법이 어떤가.
장르소설이라고 싸잡아 묶이지만 서건 중심 소설과 세계관 중심 소설은 작가와 독자들이 괌 심을 기울이는 지점이 다르다.
인물의 내면보다 사건의 속도와 호흡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로맨스와 스릴러는 사촌 관계쯤 된다.
에스에프와 판타지는 이란성쌍둥이인데, 에스에프 쪽이 배경 세계의 논리를 좀 더 강조하는 편이다.
과학적 고증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시 개요 이야기로 돌아온다.
개요를 써야 하는가? 나는 사건 중심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개요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절정에서 터져야 할 폭발의 종류와 규모를 정해놓는다면 거기까지 가는 경로뿐 아니라 그 과정에 조성해야 할 긴장감에 대해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눌 중심 소설을 쓰고 싶다면 그보다는 창조하려는 인물의 내면을, 세계관 중심 소설이라면 설정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집필 엔진을 가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돌고 돌아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는 어떤 작가인가’의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초기에는 직접 써보며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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