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소설의 인물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쓴다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물어보면 그 인물이 개성적이고
입체적으로 느껴져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여기서 입체적이라는 말은 ‘깊이가 있다’는 표현으로 바꿔서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개성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외모와 행동, 성격을 자세히
묘사해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이 사항을 많이 열거하면 그 인물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걸까?
인물의 입체성이란 그를 한 줄로 간명하게 설명하면 안 되고, 그 안에 모순을 담아야 한다는 의미일까?
몇몇 드라마 작가는 인물의 한 요소를 극단적으로 과장하기를 즐긴다.
성공에 대한 욕망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냉혈한, 오로지 올케를 괴롭히겠다는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듯한 시누이, 깨어 있는 내내 푼수를 떨고 그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주버님...
억지 개성은 있고, 때로는 강렬한 느낌도 주지만 깊이는 얕다.
뼈와 살이 있는 배우가 연기할때는 티가 덜 나지만 이걸 글로 접하면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화신이나
도구로 보일 거라 생각한다.
서브컬쳐 계열의 일부 창작자들은 여러 가지 특성이 한 몸에 모이기만 하면 그게 인물의 개성이 된다고
믿는 것 같다.
파란 머리 미소녀에 ‘병약’ 속상, ‘허당’ 속성, ‘홍차 애호’ 속성을 더하면 충분히 개성적인 캐릭터가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종이 인형 옷 입히기 놀이와 비슷한 이런 작법의 결과물은 공장에서 양산된 제품의 기시감을
줄 수 밖에 없다.
물론 얄팍하다.
나는 한 인물이 주체적인 개인으로 경험하고 행동한다면 개성과 깊이는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픽션과 현실 양쪽에 다 해당하는 얘기다.
주체적인 경험과 행동의 중요성에 비하면 그 인물이 푼수끼가 얼마나 있는지, 어떤 카페인 음료를
좋아하는지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의외로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이 점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기실 이것은 예비 작가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흔한 인지 오류 중 하나다.
우리는 모두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묘사할 때에는 그들이 경험 능력과 행동
능력 중 한쪽만을 지녔다고 착각하기 쉽다.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는 인간이 부지불식간에 타인을 ‘상처 받기 쉬운 감수자’와
‘사고하는 행위자’둘 중의 하나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웨그너가 제자인 커트 그레이와 함께 집필한 책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에서 든 사례를
조금 변형해서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어린 소녀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느 기업 최고경영자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져 망신을 주었다고
상상해보자(물론 최고경영자가 딱히 얼굴에 케이크를 맞을 만한 잘못은 저지른 게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당황하고 소녀를 나무라겠지만, 심각하게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이 코믹하다고 여기고 살짝 웃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반대로 기업 최고경영자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에 케이크를 던져
망신 주는 장면을 그려보자(물론 소녀가 잘못한 게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이제 옆에 있는 사람은 놀라 충격을 받고 최고경영자의 황당한 행동에 격분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 소녀를 행위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 능력이 큰 존재로, 최고경영자는 행위 능력은 크지만
경험 능력은 모자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에게 케이크를 던지는 소녀의 일화를 소설에 쓴다면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소녀의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까다로운 식성, 최고경영자의 괴팍한 취향과 묘한 습관을 자세히 서술하면
그들이 좀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물론 그 방법도 효과가 없지는 않다.
거기에 더해 나는 소녀의 행위 능력과 최고경영자의 경험능력에 공을 들이기를 권한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실감 나는 존재로 보일 것이다.
소녀는 왜 케이크를 던진 걸까? 그녀는 그 순간 행동한 사람이고, 거기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남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이유라도 괜찮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동의 하기 힘든 이유일 수록 소녀의 개성이 그만큼 도드라진다.
케이크를 맞은 최고경영자는 기분이 어떨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이성을 잃고 소녀의 뺨을 한 대 치기 직전일까? 소녀의 아버지를 몇 달 뒤에
해고해야겠다고 싸늘히 결심했을까? 아니면 참석하기 싫은 파티를 거절할 명분이 드디어 생겼다며
속으로 안도한는 중일까? 꼭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외면 묘사와 암시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독자가 짐작하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
학생들에게 나는 "인물의 욕망과 두려움이 느껴지게 써야 한다"말했다.
그러면서 "약자라고 욕망이 없는 게 아니고, 강자라고 두려움이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사회 경험이 풍부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정치적 올바름으르 지나치게 의식해서일까.
적지 않은 학생들이 사회적 약자를 자기 글에 등장시키면서 그들을 욕망 없이 고통과
두려움만 느끼는 존재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약자의 약자성만 강조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설명하면 예외 없이 그날이나 다음날 몇몇 학생한테 메일이 왔다.
약자에게 욕망이 있다는 말씀이 불편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 학생들의 선량한 마음을 존중한다.
그러나 욕망은 악이 아니며, 모든 인간은 욕망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약자에게 욕망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약자에게는 약자 성만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작가는, 약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욕망과 두려움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기 자식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과 그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인물의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려렴 그의 욕망을 함께 전할 수밖에 없다.
욕망만 있는 인물, 고통만 느끼는 인물, 쾌감만 느끼는 인물, 고통만 느끼는 인물, 가해자이기만
한 인물, 피해자이기마나 한 인물이 많아질수록 당신의 원고는 문학에서 멀어지고 프로파간다가
되어갈 것이다.
프로파간다로서도 제 몫을 하지 못한다.
설득력 없는 인물들이 나오는 글에는 힘이 실리지 않기에.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은 모양과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며,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 역시 픽션과 현실 양쪽에서 다 그렇다.
내 경우에는 국회를 3년 가까이 취재하며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정치인들은 욕망을 파악하기 쉬운 존재들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정치인만큼이나 오해받는 직업도 드물다.
오랜 정치적 동지인 대통령과 장관은 같은 욕망,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의 욕망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다는 데 있다.
장관의 욕망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당장 인기는 없어도 임기가 끝난 뒤 장기적으로 평가받을 정책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장관은 질색팔색한다.
대통령 지지도가 떨어지면 장관은 선 긋기를 고민한다.
대통령을 비판할수록 자기 인기가 높아지는 상황이라면 여당 후보들은 집토끼와 산토끼의
수를 놓고 복잡한 계산에 들어간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 그렇듯이.
재건축 지역의 철거민들은 어떨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욕망과 똑같은 두려움을 지닌 한 덩어리일까.
소설가가 '철거민'이라는 이름으로 그 개인들을 한 데 묶을 수 있을까.
자기 집이 없는 이와 있는 이는 사정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래서 세입자철거민대책위원회와 가옥주철거민대책위원회가 따로 생긴다.
사람마다 버티는 힘도, 물러설 곳도 다르다.
누구도 "이제는 그만하자"는 자녀들의 요구로 무너지기 직전이다.
누구는 투쟁에 참여한 걸 후회한다.
누구는 보상금을 어느 선 이상으로 받을 수 있다면 떠나겠다고 남몰래 생각한다.
그런 개별적인 사정을 묘사한 것이 철거라는 사건의 비극성을 약화시키고,
철거민을 비난하는 일일까.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