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농담(스토리)이라도 어떤 사람이 하면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이 하면 따분하다.
왜 그럴까?
말하는 요령(스토리텔링)의 문제다.
재담으로 주변을 초토화시키던 옛 친구들을 떠올려 보자.
혹은 유튜브로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의 공연을 몇 편 감상해 보자.
그들의 기술은 소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아마 몇몇 원리는 음악 작곡이나 편곡에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언어보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감각이 먼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자기 상황과 주변 세계를 서사로 파악한다.
그리고 멋진 이야기와 지루한 설교를 구별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원리들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노력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까?
(가)자연스럽게 배치한다.
2시간짜리 영화를 보려고 영화관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대강 1시간 45분 즈음이 클라이맥스일 거라고 짐작한다.
다큐멘터리 영화라도 그렇다.
400쪽짜리 소설을 펼칠 때는 350쪽 부근이 절정일 거라고 기대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3분짜리 농담을 하면 2분 40초쯤에 웃음이 터진다.
그가 농담 서너 개로 10분짜리 공연을 할 때는 가장 웃긴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한다.
이런 감각은 피부색이나 성별을 뛰어넘어 놀라 정도로 보편적이다.
사실 사람들은 절정부의 위치뿐 아니라 높이, 그리고 거기로 오르는 경사의 기울기에 대해서도 대단히 날카롭다.
우리는 처음 만난 상대의 눈, 코, 입의 위치와 크기와 상대적 비례를 따져본 뒤 '저 사람 잘생겼다'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한 눈에 알아차린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뜸을 너무 오래 들이네, 군더더기가 너무 많네, 뒷심이 부족하네, 왜 이렇게 갑자기 끝나나, 하는 반응은 이야기의 길이와 배치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절정의 절대적 높이가 아니라, 발단-전개-절정-결말이 서로 이루는 상대적 거리와 높낮이다.
절정이 정해지면 나머지 부분을 거기에 맞춰 줄이고 깎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다짜고짜 시작한다.
"지금부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 다 뒤집어져, 배꼽 빠질 각오 단단히 해!"하고 말을 꺼내는 사람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훌륭한 이야기꾼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불쑥 시작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하는 동물이고, 아주 바쁘거나 뭔가에 몰입해 있는 상태가 아니면 거의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태세가 되어 있다.
특히 이미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 독자를 상대를 펼칠 이야기라면 걱정할 게 없다.
그냥 다짜고짜 어떤 장면 한가운데서 시작해도 된다.
알지 못하는 인물의 대사로 포문을 열어도 괜찮다.
앞으로 말하려는 사건이 화창한 6월 어는 날 벌어진 일이라든가, 어느 왕국이 지배하는 어느 대륙에서 어느 가문이 보유한 성의 몇 층이라고 무대를 굳이 설명하지도 않아도 된다.
반면 결말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반 발 앞서 마치기를 권한다.
더 극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재담가들 역시 무대에 여운이 남아 있을때, 사람들이 아쉬워할 때 재빨리 물러난다.
사람들이 박수칠 때 인사하자.
(다)먼저 웃지 않는다.
상대보다 먼저 웃거나 울면 안 된다.
농담을 할 때도, 어제 본 감동적인 영화 줄거리를 배우자에게 설명할 때도, 소설을 쓸 때도 그렇다.
물론 되풀이해서 펼쳐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훌륭한 소설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에서 얻는 즐거움의 상당 부분은 예측 불가능성에서 온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절정의 감흥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의 폭발에서 온다.
<심청전>에서 부녀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자.
심청이 인당수에 빠질 때와 비교하면 큰 위기라 할 게 없다.
맹인잔치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해도 심청에게는 언제든 다음 기회가 있다.
황후니까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도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논리보다는 정서를 좇아간다.
아버지와 딸의 만남에 감동 받아 눈물 흘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심청이 아무리 가슴을 졸여도 심학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잔치가 끝날 때가 돼서야 겨우 나타난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뭔가를 제대로 터뜨리려면 폭발 직전까지 최대한 꽉꽉 눌러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말이 아무리 밝은 해피엔딩이라 해도 주인공이 쓰러지고 무너질 때는 시치미를 뚝 떼야한다.
반대로 마찬가지다.
(라)호흡을 조절한다.
사실 장편소설이나 장편영화에서 정서가 딱 한 번만 폭발한다면 좀 심심하다.
산을 오를 때도 기슭에서 정상까지 내내 일정한 각도로 비탈이 이어지는 길이라면 따분하다.
적당한 간격으로 봉 우리들이 있어서 오르고 내리는 맛이 있는 등산 코스에 사람들이 몰린다.
그렇다고 시작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감정이 폭발하면 그건 마이클 베이 영화다.
탁월한 무대 예술가들은 이 호흡을 귀신처럼 조절한다.
유능한 코미디언들은 청중에게 웃음을 터뜨릴 시간을 준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감상자의 표정을 확인하며 작품을 수정할 수 없으므로 다소 불리한 처지에 있다.
어느 정도는 퇴고를 하며 편집자와 주변의 지인의 의견을 구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경험을 통해 감을 익힐 수밖에 없다.
노련한 작가는 그렇게 이야기의 호흡을 조절해서 절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청혼하면 독자들은 뒤에 벌어질 일을 궁금해한다.
작가가 답을 미루면 긴장과 불안이 생긴다.
아예 거기서 챕터를 마치거나 다음 연재분으로 전개를 미루는 기법을 '클리프행어'라고 부른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이름이 나온 유서 깊은 테크닉이다.
티브이 드리마도 이런 수법을 많이 쓰고, 스탠드업 코미디언들도 펀치라인으로 날리기 전에 뜸을 들인다.
(마)강조하고 과장한다.
강조할 부분을 강조하고 과장할 대목을 과장하는 것은 소설가의 특권이자 의무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문장 아래 빨간 줄을 여러 번 그으면 저절로 그런 효과가 생기는 걸까? 이때야말로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조언이 힘을 발한다.
인물의 고통을 강조하고 싶다면 그의 표정을 보여줘라.
독자의 본증적인 심리를 이해하면 어떤 방향으로 상황을 과장해야 할지 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은 여전히 원시시대와 다를 바 없다.
외줄 타기 곡예를 더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방법은 뭘까.
줄의 높이를 높이면 된다.
줄 아래 안전그물 대신 악어떼나 화염이 있다고 하면 독자들은 더 간을 졸일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고 곡예사가 올라야 할 밧줄도 안전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불량품이라고 하면 더 아슬아슬해진다.
공포영화의 살인마들은 왜 총이 아니라 칼이나 전기톱을 휘두를까? 관객 대부분이 칼에 찔려 신체가 흉하고 고통스럽게 훼손되는 것 보다 차라리 총에 맞아 단번에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치욕보다 죽음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런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수치에 다한 두려움을 활용할 수 있다.
(바)분명하게 전달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사항 하나, 아무리 세상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발음이 안 좋은 사람이 웅얼웅얼하며 읊는 바람에 청중이 무슨 말인지 데대로 듣지 못했다면 웃음은 터지지 않는다.
소설의 서술도 그렇다.
무슨 상황을 묘사하는 건지 문장들이 명료하게 받쳐주지 못하면 스토리텔링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때 작가의 개성적인 문체는 재담을 더 맛깔나게 하는 이야기꾼의 독특한 표현이나 몸짓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스토리텔링은 얼마 간은 기교의 영역에 있다.
얼마간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초반에 너무 어렵다는 지적을 받자 "내가 힘들게 썼으니 독자도 힘들어야 한다"라고 대꾸했다.
그래도 <장미의 이름>은 초입만 넘어가면 대단히 재미있다.
세상에는 마르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토머스 핀천 같은 소설가도 있고, 그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위에 적은 사항들도 반드시 따라야 할 법칙이 아니다.
연장통에 넣고 다니다 필요한 순간 적절히 꺼내 쓸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