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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감정은 내 삶의 나침반
현대 정신의학은 '삶에서 예상되는 많은 문제들은 알고 보면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 장애이므로 약을 먹어서 해결하라'고 세뇌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그런 방식으로 지적, 물적 토대를 쌓아올린 의료 산업은 이제 어찌해 볼 수 없는 진격의 거인이 되었다.
자식을 읽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불안과 공포가 왜 우울증인가.
은퇴 후의 무력감과 짜증, 피해 의식등이 어떻게 우울증인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 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은 비정하고 무책임하다.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이다.
누구도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가파른 언덕에서, 어떤 태도로 서로를 대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허둥지둥 전문가를 찾는 일보다 먼저여야 우리의 삶은 편안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진도, 안산, 목포로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거의 똑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기력하다. 죄책감이 든다."
그 사람들의 무기력이나 죄의식은 패자의 감정이었을까, 아니다.
지난 5년, 세월호 유가족 같은 극한의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목숨을 버리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이런 시민들의 거대함 무력감과 죄의식의 연대가 만들어낸 치유적 공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었다고 느꼈다.
마침내 세월호를 육지로 끌어올린 힘도 무력감과 죄의식의 연대들이 만들어낸 분노가 근본 동력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언론들까지 가세해 참사 피해자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댔는데도 피해자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그 거대한 무력감과 죄의식의 공기가 수호천사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우리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힘은 무도한 정권을 끌어내리는 힘의 결정적인 일부였을 것이다.
죄의식과 무력감은 겉보기엔 자신감 갉아먹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사 이래 가장 강한 위력을 내포한 사회적 힘을 이끌어냇다.
죄의식과 무력감의 연대가 해낸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와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책장을 다 넘기고 글을 쓰곤 했는데.
이 책은 그렇게 쓸 수가 없는 내용인 것 같아 마음에 와 닿는 글이 있으면 쓰기로 했다.
너무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려
우린,
우리의 감정까지 누군가에게 맡겨 버리는 건 아닌지.
살면서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것으로 그 감정을 위안받지는 않았을까.
가늠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영역에서의 판단과 해결방법을 새롭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