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지은 밥같이 든든한 칭찬과 인정이란
다시 아이 얘기로 돌아가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게 있다.
자녀가 성적이 올랐을 때 칭찬을 하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반응이 아니고 그가 올린 성과에 대한 반응이니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주목이고 공감일까.
아이에게 칭찬할 때 "와우! 성적이 그렇게 올랐구나. 참 잘했다"는 식으로 오른 점수에 방점을 찍는 칭찬보다는 "성적이 그렇게 많이 올랐구나! 네가 이번에 정말 노력을 많이 했나 보다. 참 애썼어"라고 한다면 오른 성적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성적이 오르는 상황을 이끌어낸 '아이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외형적 성과나 성취 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부작용이 없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대만큼 포만감이 없다.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한 공감도 없고, 오른 석차에 대한 반응도 없는 무관심보다는 낫다.
하지만 밥 없이 반찬으로만 배를 채운 사람처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편안한 포만감이나 포만감으로 인한 안정감이 없다.
반찬으로만 채운 배는 한계가 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은 갓 지은 밥 같은 것이다.
잘 지은 밥이 있으면 간장 하나만 가지고도 든든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밥이 기본이라서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계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톨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난,
세 아이에게 똑같이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기회속에서 나는,
세 아이를 내 나름의 잣대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다.
공평한 환경, 기회보다는
그 아이에 맞는 환경을 함께 찾아주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은 아이가 어려서 성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으나 그 성과에 대한 칭찬만 했던 것 같아 후회한다.
내 아이들을 시험지의 정답만 잘 고르는 그런 아이들로 키우고 싶지는 않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