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하나의 아슬아슬한 신기루 같았다.
광주변두리, 기찻길옆의 셋집에서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십일월이 끝나던 즈음의 오전이었다.
아버지는 철길 옆 뚝방에 내 태를 묻었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는 그곳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뱃속에 들었던 초여름 어머니는 의사 장티푸스에 걸렸다.
열이 끓고 몸이 추워, 실성한 사람처럼 겹겹이 옷을 껴입고 지냈다.
한달 동안 매끼한 움큼씩 약을 먹고 겨우 회복되었는데, 몸을 추스르자마자 어머니는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갔다.
의사는 말했다.
임신 4개월로 접어들어 태반이 형성됐으니 당장은 위험합니다.
2개월 후에 다시 오면 유도분만을 할 수 있습니다.
2개월이 지난 뒤 어머니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왜 안 가셨어요?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어머니는 대답하셨다.
그냥. 가기가 싫더라.
그렇게 나는 태어났다.
병원에서 나은 게 아니니 체중을 달아보진 못했지만, 겨울 팔뚝만 한 크기에 까맣고 깡마른 갓난아이였다.
출산하는 날까지 잠을 못 이루며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는 스무 개의 손가락을 다 세어본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자라는 동안 나는 여러 어른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그것은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나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 삶이란 저절로,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마치 아슬아슬한 신기루처럼, 혹은 얇은 막처럼, 수많은 변수들이 우연히 만난 결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일뿐이었다.
물론 그때 내가 이렇게 정리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로 모든 것이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낯설어지고, 의문스럽고, 어쩐지 헐거워지는 듯한 느낌일 뿐이었다.
책, 공상, 타이프라이터, 그리고 풀리지 않은 의문들.
어린 시절, 집에는 책이 많았고 나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책등에 인쇄된 제목들을 읽으며, 그 중 아무 책이나 골라 읽으며, 공상에 잠겨 혼자서 이런저럭 얘기를 꾸미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열 살 무렵,
아버지는 안 쓰는 타이프라이터를 장남감으로 주셨다.
거기 이면지를 끼워 드르륵드르륵 감고 마음 가는 대로 글자를 치며 노는 것은 내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한 줄의 끝까지 치는 순간 땡, 하고 울리는 낭랑한 소리를 나는 좋아했다.
자음과 모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단어들의 모양과 소리, 느낌은 신비로웠다.
그 때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단어는 '숲'이었다.
비교적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신 아버지는 9남매의 가장 노릇을 했다.
덕분에 집은 늘 어려웠고, 삼촌들과 고모들, 사촌들로 북적거렸다.
학교에서 가족사항을 적어오라고 하면 늘 내 것이 가장 길었던 기억이 있다.
막내고모가 자립해 집을 떠남과 동시에 아버지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소설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부모님은 우리 3남매만 데리고 일가친적 없는 서울로 올라왔다.
내가 열한 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그래저래 나는 광주에서부터 보낸 초등학교 시절 동안 다섯 번의 전학을 했다.
오래 친구를 사귀기에 좋은 조건은 아닌 셈이었다.
6학년 가을 어는 날의 점심시간이 떠오른데,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내가 모르는 고무줄놀이를 하고-
고무줄놀이는 지방마다 다르다.
광주에서 나는 고무줄을 꽤 잘하는 축이었지만, 그때 서울 아이들이 하던 "전후의 시체를 넘고 넘어......"는 끝내 배우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교실 창문으로 내다 보고 있었다.
내다보는 일이 지루해지자 나느느 교실 뒤편의 학급문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볼 만한 책을 찾아내 읽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시간이 정지했다.
그 뒤 나는 점심시간이면 창밖을 내다보는 대신 학급문고가 있는 뒷자리에 앉아 책이 주는 무아경에 들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부터 문학에 골몰한 조숙한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순진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환경이 바뀔 때마다 빨리 적응하는 편이었다.
문학을 진하게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참 뒤,
열다섯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이어진 사춘기 무렵이었다.
나는 누구인지,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살아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따위의 의문들에 시달리던 그 때 무심코 주워 읽었던 소설들과 시들은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어둡고 더러 반항적이었던 그 시기를 빠져나올 때쯤, 나는 옛 친구들이 놀랄 만큼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가슴에 품고 몸부림쳐도 해결되지 않았던 그 의문들에 대한 대답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질문을 던지는 방법으로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고, 아무도 부럽지 않았던 충일감.
국문과에 적을 둔 4년간의 대학시절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거리를 쏘다니며 보냈다.
어는 순간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애타게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꿈꾸는 소설이었다.
결국 내가 꿈꾸는 방식의 소설은 내가 쓸 수 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머뭇거리며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시와 소설을 함께 썼지만,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보여주기에 좋은 시로 합평회를 하곤 했다.
정현종 선생님의 시창작론 시간을 잊을 수 없는데,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학생들 모두에게 시를 제출하게 한 뒤 매 시간 두 편씩 골라 복사해 나눠주시곤 직접 낭송하며 평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첫 시간에 내 시를 읽어 주시고, "무당기 같은 게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큰 힘이 된 말씀이었다.
<샘터>출판부에 취직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겨울이었다.
소문난 박봉이었던데다 역마살이 있는 나에게는 종일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상사였던 시인 김형영 선생님은 내가 시를 쓰는 것을 알고 가져와 보라고 하셨는데, 두툼한 미당 시선집을 사주시며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1년 동안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며 시와 소설을 썼다.
주말과 새벽, 밤 시간만이 자유였으므로 하루는 안타깝게 짧았다.
늘 졸리고 피곤했지만, 대충 씻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켜면 몸에 환한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어서 책상 앞으로 가고 싶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파른 골목길을 뛰어 올라기기도 했다.
늦가을에는 황혼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썼는데, 사무실 창으로 붉은 저녁 빛이 내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벅찼다.
소설의 배경이 된 어두운 폐고 앞의 골목에서 밤늦도록 서성거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때의 순순한 충일감을 잊지 못한다.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았고, 어느 것도 욕심나지 않았다.
그저 남몰래 가진 글쓰기의 기쁨을 평생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해 겨울 계간 <문학과 사회>에 시가 실리고, 이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소설이 당선되면서 나는 "글쓰는 사람"이 되었다.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것에 나는 감사했다.
그 후 잠을 좀 제대로 자고, 마음껏 읽고 쓸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글만 쓰고 산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다시 <출판저널>과 <샘터>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장편소설을 쓸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그만둔 것이 95년 겨울이었다.
그리고는 직장없이 "글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겠다.
흔히 말하기를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고통보다는 자유와 몰입, 충일의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 나에게 글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아마 존재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글쓰기의 땃은 아니다.
"나느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요"라는 뒤라스의 독백을 기억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계속 으깨어지며 나아가고 싶다.
그 으깨어짐이 내 삶을 끝까지 관통해 주기를 빌고 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렇게 온몸으로 던져내는 질문들이 곧 그 대답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