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 인간이 가끔 빛나는 순간이 있다. '알 수 없음'의 영역이 있음을 아는 순간이지(무지의 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함보다는 모르는 게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인간다움에 가깝다. 말에도 왜 이런 말이 만들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얻어맞다'.
무엇을 '얻었다'고 하면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 것이니 '사다'와 다르고, 되돌려주지 않아도 되니 '빌리다'와도 다르다. 요즘 말로 '득템'에 가까우려나. 다른 말과 함께 거저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옷을 얻어 입고 신발을 얻어 신고 차를 얻어 탄다. 밥도 얻어 먹고 술도 얻어 마시는 날이 많으면 좋으련만. 일부러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얻어걸리다'는 어떤 일이나 물건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고, '얻어듣다'도 우연한 자리에서 어깨너머로 '주어들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얻어맞는다' '얻어터진다'인가. 맞는 것도 서러운데 일부러 매를 자청할 리는 없다. 뭔가를 얻게 되면 그것이 내 쪽으로 오는 것이므로, 얻어맞는 것도 매나 주먹이 나를 향해 오는 것이라 그렇게 썼으려나 하며 끼워 맞춰 보지만, 억지스럽고 신통하지가 않다.
단어를 어법에 맞게 쓰는 일보다 그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 더 궁금하다. 그는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엉뚱하며 얼마나 힘껏 빈둥거렸을까. 맞고 들어온 아이를 향해 불쑥 '어디서 얻어맞았을꼬?'라며 깔깔 웃었을지도.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데. 이 빈틈없는 지루한 세상에 새로운 단어 하나 만들지 못하는 진부한 나에 비하면,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