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낮이'처럼 반대말끼리 부둥켜안아 새 단어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한몸이 되면 뜻이 달라지기 일쑤. '위아래'는 정반대의 위치를 가리키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 사이의 위계를 뜻하기도 한다. '홀짝'은 단순하되 박진감 넘치는 놀이이다. '오르락내리락'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되풀이'하는 모습을 담는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에 쓰인 '오다가다'는 아예 품사를 바꾸어 '우연히'라는 뜻의 부사가 되었다. 한자어는 더 흔하다. '전후, 좌우, 선후, 완급, 강약, 장단, 빈부, 귀천, 희비, 생사, 출입···.' 끝이 없다. 서양 말에는 이런 식의 단어 조합이 없다.
그중에 '경조사'라는 단어는 왠지 입속의 모래처럼 꺼슬꺼슬하다. '경사'와 '조사', 기쁜 일과 슬픈 일의 병존이라니. 둘은 정말 같이 놓일 만한가? 겉만 보면 공통점이 많다. 옷을 갖춰 입고 인사를 하고 돈(축의금, 조의금)을 내고 밥을 먹는다.
속을 들여다보면, '경사'는 수천수만 가지지만, '조사'는 한가지. 아이가 태어나도, 합격을 해도, 졸업을 해도, 사랑을 해도, 결혼을 해도 경사로다. 경사로세. 살면서 춤추고 노래 부를 만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조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죽음'밖엔 없다. 모든 게 멈추고 뒤틀리며 무너져 내리는 죽음만이 '유일한' 슬픔이다. 그래서 '조사'는 '경사'와 함께할 수 없다.
무례한 자들은 죽음 옆에 죽음 아닌 것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죽음을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사건 중의 하나로 만든다. 이를테면 '쌍특검'이란 말(김건희 특검법+채 상병 특검법)은 '경조사'란 말처럼 함께 묶여서는 안 될 말이다. 젊은 군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다. 한낱 대통령 부인의 부패와 한 묶음이 될 수 없다. 쌍스럽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 경희대 교수
언제나 그랬다.
민심에 역행하는 왕조나 정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특히나, 백성이나 국민의 죽음을 방치하는 그 어떤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