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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17)에세이 쓰기 - 4.감추기의 기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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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0일 토요일 한겨레 18쪽

'좋은 에세이를 쓰려면 자신만의 개성을 가꾸고 솔직히 잘 드러내야 한다, 좋은 글에는 개성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하면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몰래 하던 불온한 생각,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사적인 사연, 지인들에 대한 품고 있던 원망 등등.

그런 질문을 받으면 먼저 내 사례를 든다.

어지간히 솔직히 에세이를 써도 별일 안 일어난다.

자기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뭐 이따위 생각을 하느냐며 불쾌해하는 독자도 있다.

지인 중에는 "그랬어?" 하면 재미있어하는 이도 있다.

그게 전부다.

결국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비율은 에세이를 쓰기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을 드러내는 데 대한 예비 저자들의 걱정은 지나 보면 허탈할 정도로 별일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좀 더 용기를 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긴, 이러는 나는 몇년 전까지 원고를 동내 문구점에서 제본할 때 사장님이 내 글의 첫 장을

쳐다보는 것도 무안했다.

겉봉에 출판사 주솔르 적은 우편물을 우체국에서 보내는 게 부끄러워 무인우편창구를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물론 우체국 직원들은 내 원고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문구점 사장님과는 나중에 친해져서 문학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제본할 워고가 많아 하도 자주 드나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러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도 있을 것 같다.

다행히 그런 경우에 집필을 포기하지 않고 살짝 우회하는 길도 여러 가지 있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쓰고 있는 요령을 몇가지 소개한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안을 포함해, 어떤 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먼저 필명을 쓰는 방안이 있다.

한번은 어느 예비 저자에게 "필명을 쓰는 것은 비겁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는 저자들뿐 아니라, 본명을 딱히 숨기지 않지만 작가 활동과 일상을 분리하고

싶은 필자들까지 많은 이가 애용하는 방법이다.

마크 트웨인, 조지 오웰, 루이스 캐럴, 오 헨리, 이상, 이육사, 박경리, 신경림, 이문열, 황석영, 다자이 오사무,

에도가와 란포....모두 필명이다.

필명을 여러개 쓰는 사람도 있고 본명과 필명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필명이 스무 개가 넘었다.

 

 

어떤 예비 저자들은 데뷔 때 사용한 이름을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그런 법은 없다.

안톤 체호프는 처음에 필명을 쓰다가 나중에 본명으로 바꾼 사례고, 로스 맥도널드는 반대다.

지금 한국의 젊은 작가들 중에도 필명을 쓰는 이가 여럿이고, 필명을 쓰다 본명으로 바꾼 사람도 있다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글 속의 고유명사들을 바꾸는 방법도 있겠다.

머리말이나 작가의 말에서 '몇몇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명, 기관명을 비롯한 세부 사항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바꿨다'고 밝혀 주면 된다.

그렇게 밝혀준다며, 그리고 시간이나 장소가 중요한 일화가 아니라면 분당을 일산으로 변경하고

2018년에 있었던 사건을 2019년 경험담이라고 적는다고 해서 독자를 기만하는 일은 아닐 터다.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머리글에서 '환자의 이름과 세세한 사항은 바꾸었다'고 밝힌다.

그가 바꾼 '세세한 사항은 이렇다.

<아내를 모자로...>에는 색스 박사가 뉴욕 길거리에서 슈퍼 투렛증후군에 걸린 한 여성을 목격한 에피소드가

나온다('투렛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색스 박는 이 책에서 '60대로 보이는 백발의 노부인'이 '한 블록 정도의 짧은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2분 사이에

40~50명이나 되는 사람을 흉내 냈다고 적었다.

색스 박사는 그 노부인을 마주친 것을 우연처럼 묘사하면서 '뉴욕과 같은 거대 도시의 이름도 모르는

길거리만큼 환자를 관찰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없다'고 썼다.

그런데 사실 그런 백발 노부인은 없었다.

색스 박사가 실제로 관찰한 사람은 그가 자서전 <온 더 무브>에서 '존 P.'라고 부른 환자였다.

존 P.는 노부인이 아니라 젊은이였고, 색스 박사는 그를 투렛증후군협회 모임에서 만났다.

색스 박스는 존 P.와 함게 여러달에 걸쳐 연구했다.

<아내를 모자로...>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색스 박사가 존 P.와 함께 외출한 첫날의 묘사였다.

색스 박사는 <아내를 모자로...>의 서술에 대해 자서전에서 '존 P.를 길에서 만난 어떤 노부인으로 위장했다'고 표현했다.

글쎄, 환자의 사생활을 둘러싼 의료인의 윤리를 감안해도 <아내를 모자로....>의 사실 수정에는 조금 고개가 

가웃거려지기는 한다.

특히 저자가 투렛증후군이 매우 흔한 증상이며, 뉴욕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썼기 때문에 더 그랬다.

어쨌든 현대의 고전 반열에 거의 올라선 논픽션에서 이 정도의 사실 변형을 했고, 그게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예비 저자들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이 선을 넘지는 말자.

나는 보다 얌전한 방법을 선호한다.

구체적인 사항을 적당히 흐리는 것이다.

2013년은 2010년대 초반으로 , 회사 선배라면 업계 동료 정도로 둘러 쓰는 식이다.

내가 겪은 일을 지인의 경험담이라고 적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까? 지인들의 경험담을 내가 겪은 일처럼

쓰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지인이지만, 그 역은 참이 아니니까.

나는 때로 다른 사람이 신경 쓸 만한 사안에 아예 당사자에게 원고 일부를 보내 허락을 구하기도 한다.

대개 사람들은 그런 요청을 받으면 저자의 성의 자체를 높이 평가해서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자기와 관련된 일을 쓰는 걸 흔쾌히 허락해주는 이들 역시 항상 내 기대보다 많았다.

내가 예상한 상대의 걱정과 상대가 진짜로 걱정하는 지점이 완전히 달랐던 점도 많다.

그렇게 상대가 우려하는 지점을 보다 정확히 파악해 글의 맥락과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표현을 다듬은 적도 있다.

물론 그랬다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적도 있고, 결국 내 의도대로 밀고 나간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에게 배신감이 들게 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있다.

저널리즘 성격의 에세이나 논픽션을 쓸 때에도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비판 대상에게 미리 원고

일부를 보내거나 글의 의도를 알려도 괜찮을까? 논쟁적인 문제다.

한국의 몇몇 기자들 중에는 그런 행위를 저널리즘 윤리를 저버리는 것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반면 <월스트리 저널>처럼 '아무도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진 언론사도 있다.

<월스트리 저널>은 대형 폭로 기사를 내기 전에 자신들이 아는 모든 정보를 대상에게 알리고

반론 시간을 충분히 준다고 한다.

미국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잡지 <오리고니언>에서 25년간 편집장을 맡았고 퓰리처상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한 잭 하트는 자신이 기사의 일부, 

때로는 전체를 취재원에게 자주 보여주고 썼다.

그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책 <논픽션 쓰기>에서 고백하는데, 자신과 정반대 의견인 저널리스트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저자가 합의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없고, 각자 양심에 따랄 자신의 원칙을 정하는 게 

최선 아닌가 싶다.

하트는 취재원에게 "사실관계 오류는 바로잡겠지만 해석은 나만의 것"이라고 미리 알린다고 한다.

<인체 재활용> <봉크>등을 쓴 과학저술가 메리 로치는 인용문은 인터뷰에게 읽어주며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지만 원고 전체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예비 저자들은 큰따옴표 안에 누군가의 말을 옮겨 적을 때에는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된다고 믿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그건 지나치게 고지식한 신념 같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해서 그대로 받아쓰기를 해보면, 앞뒤가 맞게 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놀랍도록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도 문장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에세이와 논픽션에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의 의도와 뉘앙스를 왜곡하면 절대 안 되겠지만,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문장을

수정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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