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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2021년 1월30일 토요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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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토요일 오전.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신문을 봅니다.

눈이 내려서 감정적인 부분을 자극했던지 몇 개의 글들이 마음을 울려 글을 올려 봅니다.


한겨레 12면 하단

남의 집 드나드는 닥터홍  17.코로나 시대의 진정한 애도

 

"원장님, 임종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연락 주세요. 그런데 새벽이라면 제가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2년째 계약 의사로 순회 진료를 하는 요양원에서 어른신의 임종을 함께할 수 있을지 문의 주셨다.

지금 코로나 시기라 보호자가 장례 계획이 없고 바로 화장을 하기로 했다고 하여 어르신을 진료하던 의사인 내게 사망선고를 부탁하신다.

이 요양원은 10여분이 지내는 작은 공동체로 어른신들, 직원들 모두 나를 친절히 맞이해주셔서 갈 때마다 기분 좋고 힘을 얻는 곳이다.

수희(가명)어르신은 변비로 고생하셔서 변비약을 종종 드리다가 최근 혈압이 높아 혈압약을 조금 처방했었다.

90살이 훌쩍 넘어 누워서 지내며 의식이 명료하지 않아 임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최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 원장님이 미리 나에게 임종을 언급하신다.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지만 혹시라도 수희 어른신이 가실 때 그 길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이전에는 희주(가명)어른신이 내가 갈때마다 말씀도 잘하시고 약에 대해서도 물어보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다가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돼 

대학병원 중환실로 급히 입원하신 적이 있었다.

희주 어르신이 돌아가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회복하여 요양병원에 머무르고 계신다.

열흘쯤 지났을까.

이제 막 씻고 잠을 청하려던 밤 11시께 요양원 원장님께 연락이 왔따.

마침 깨어 있어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원장님, 수희 어른신이 임종이 임박한 거 같은데 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바로 택시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요양원에 들어섰다.

몸이 아직 따듯하다.

진찰을 해보고 심폐소생수을 하였다.

결국엔 사망선고를 하고 다시 병원에 들러 서류를 준비했다.

"늦은 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제가 시간을 맞췄네요. 고맙습니다."

요양원 여러 직워들이 수희 어른신의 가시는 길을 함께했다.

방문 진료를 하며 임종을 종종 마주한다.

가족, 친지, 이웃이 함께 모여 임종을 하기도 하고 쓸쓸히 홀로 마지막 숨을 쉬기도 한다.

분명 며칠 전까지 찾아 뵈었는데 어디선가 누구도 모르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기도 한다.

코로나 시기라 어떤 분들은 제때 이송을 하지 못해 응급차에서 사망하기도 하고 코호트 격리 중 시설에서 사망하기도 한다.

임종 소식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지만 코로나 시기라 그런지 허망함을 더 크게 느낀다.

망자에게도 코로나 검사를 하는 병원이 이해가 되면서도 차갑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시기라 장례식 소식을 전하기도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하지만 단체 메세지 창에 끝없이 올라오는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문장은 뭔가 부족한 애도로 느껴진다.

코로나 시기라도 가는 이에게 충분한 애도를 보냈으면 좋겠다.

모든 면회가 금지되어 격리 상황이나 다름없는 요양시설의 어른신들이 혹시 임종을 앞두고 유족들과 삶을 정리하고 애도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 최근 이해할 수 없는 사망 소식들에 마음이 심란하다.

가는 이를 애도하며 남은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픈 어르신들이 여생을 보내는 요양시설이 안온한 공간이 되어 삶의 마지막이 은폐되지 않고

따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바꾸는 일이다.

더 나아간다면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을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문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본이 건강의 기준을 높이는 사회에서는 그게 성숙함이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부응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른'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때, 건강의 기준이 올바르게 재조정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다가,

얼마전 거래처 사장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 장례식장에 잠시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요양병원에 괜찮게 계셨는데 연말, 연초의 코로나 확진자의 수가 급증해 면회가 안 되면서부터 병세가 악화되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면회가 안 되면서 어머님께서 자식들로부터 '버려진','홀대'를 받는 다는 그런 느낌이 심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 혼자라는 감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전 둘째 매형의 형님도 메르스때에 피부암이 재발되어서 입원했다가 보호자랑 격리되면서부터 병세가 악화되면서,

정말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떤....상황.

감히,

죽음에 대해 어떻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 죽음의 문턱에 혼자 남겨진다는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께서도 더 나이가 들어 아프게 되면 요양병원, 요양원에 보내라고 하시지만,

그냥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난 솔직히 모르겠다.

그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19면 왼쪽 중간

뉴노멀 아니 노노멀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많은 사람이 뉴노멀(new normal)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전에는 주로 경제위기 뒤에 새로운 경제적 표준을 가리킬 때 사용했지만, 코로나 이후 사람들의 일상 행동까지 포괄하는 표현으로

확대되어 쓰이는 듯하다.

어느 쪽이든 "백 투 노멀"(back to normal), 즉 그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태도는 공통이다.

이전의 익숙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래서 그것이 정상, 즉 노멀이고 현재는 비정상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더라이어스 마더 감독의 <사운드 오브 메탈>이다.

몇 년 전 약물중독에서 벗어난 드러머 루빈(리즈 아메드)과 어머니의 자살 이후 집을 나온 보컬 루(올리비아 쿡)는 연인 사이로 2인조 

메탈 벤드를 구성하여 캠핑용 자동차를 집 삼아 떠돌면서 공연을 하며 산다.

그러나 루빈이 갑자기 청력을 읽으면서 둘의 삶은 비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공연을 망치면서 삶의 중심이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루빈이 담배를 다시 물고 폭력적인 면을 드러내는 등 중독의 증후들이 나타나면서 

둘의 관계도 단절된다.

이 상태에서 제목이 말하는 메탈의 소리란 일차적으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터져 나오는 헤비메탈 음악의 소리, 루빈에게 정상적인 과거를 

상징하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중동치료소를 겸한 청각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간 루빈의 정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이 이영화의 중요한 축이다.

물론 루빈에게 정상이란 청력, 음악, 연인을 회복한 상태이며, 그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대개는 정상적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원안과 각본까지 담당한 마더 감독은 중독이라는 문제를 끌어들여 영화를 다른 수준에 올려 놓는다.

루빈이 청력을 읽고 당황하는 모습을 그럴 만한 반응이라고 감싸 안지 않고 단호하게 금단증상처럼 다룰때부터 느껴지는 것이지만,

감독은 루빈이, 또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을 익숙한 것에 중독된 상태가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실제로 루빈이 온 힘을 기울여 정상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영화의 구루 역할을 하는 청각장애인 공동체 지도자 조(폴 레이시)는 그가

중독자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한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는 묻는다.

루빈이 그렇게 복원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관연 사랑인가? 우리는 영화의 음향을 통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루빈의 귀로 소리를 듣는데, 루빈이 정상을 복원하려 할 때 결정적 수단이 되는 인공 달팽이관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메탈의

소리기는 하나 정상의 모조품, 거슬리는 금속성일 뿐이다.

결국 루빈이 내리는 결정은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겠다는 발상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가 청각장애인 공동체에서 보낸 시간이 영화에서 결코 낭비가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이 공동체는 자신들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보조 장치를 통해 정상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가 정교하게 조합해 놓은 대로, 사랑, 청각, 중독에서의 루빈의 금단적 각성은 동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첫 장면의 메탈 소리와 대비되는 소리 아닌 소리를 듣는 루빈에게 떠오른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찾아야 하는 뉴모멀일까? 영화의 논리는 그렇다고 답하지 않는다.

뉴모멀이라 해도 중독의 대상이 바뀔뿐 다시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며 중독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루빈의 눈앞에 보이는 파란 하늘은 뉴노멀이 아니라 노노멀(no normal)의 사유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게,

누가....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작금의 시대에선,

마스크를 쓰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지 않으며,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 시대로 생활패턴의 변화가 바뀐 것이 정상이고,

그 이전의 일상들이 비정상이 되는 것인가.

어떤 일상에 중독이 되느냐, 중독되지 않느냐....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 또한 개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9면 왼쪽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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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 노력가

 

칩거하는 프리랜서로 살며 얼마 전 모처럼 밖에 나갈 일이 있었다.

외부활동이 끊어진 이후 늘어진 시곗바늘처럼 사는지라 외출 준비에도 늦장을 부리고 말았다.

내가 '느리광 부렸다'라고 표현하곤 하는 종류의 태만함이었다.

좀 더 눕자, 좀 더 졸자 하다 결국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집에서 뛰쳐나왔다.

나부끼는 앞섭을 달려가며 여몄을 정도로 정신없는 외출이었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안심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이어폰이 없었다.

급히 나오느라 빼 먹고 온 것이다.

교통수단에 몇 시간은 실려 다녀야 하는 날이었는데 소중한 고막 친구를 집에 두고 오다니.

엄청난 낭패였다.

딱 5분만 일찍 준비를 시작했어도,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에게 5분의 여유만 더 있었어도 이어폰 정도는 챙기고 나왔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 긴 공허의 시간을 음악으로 채울 수 있었을 텐데.

문득 5분을 아쉬워하는 이 마음에 기시감이 들었다.

근래 내 일상이 경미한 게으름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언제나 5분 혹은 5%였다.

나는 늘 5%의 게으름으로 많은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며칠 전에도 오리를 하며 도마 설거지가 귀찮다는 이유로 캔에 든 햄을 꺼내지 않고 칼집을 하다 찌개에 햄을 통째로 빠뜨린 적이 있다.

사방 벽에 붉은 국물이 튀어 닦고 치우느라 더 많은 시간을 썼다.

설거지를 할 때도 또 어떤가.

소매를 단단히 걷는 것이 귀찮아 대충 추키고 하다가 오후 내내 젖은 소매로 지내곤 햇다.

업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곳저곳에 글을 기고하며 사는데 노트북에 몇 개, 데스크톱에 몇 개, 태블릿 피시에 몇개 하는 식으로 파일을 산발적으로 흩어놓아 이따금

글이 유실되곤 한다.

작업을 마치고 파일을 한곳에 아카이빙하는 5분 정도의 노력을 빼먹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5%의 부지런함을 더하지 못 해 50%를 수습하며 사는 삶이라니.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결정한 나의 신년 목표는 '5%의 부지런함'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면 된다.

낮에 집에서 티브이와 영화를 볼 때, 고작 집을 어둡게 한 정도인데 두어시간 영화관에 온 것처럼 몰입감이 커질 것이다.

장을 보고 와서는 종이에 식재료를 메모해 냉장고에 붙여둘 것.

문짝에 붙은 몇줄의 메모 덕에 냉장고 어는 귀퉁이에서 절명하는 먹거리가 줄어들 것이다.

생수 열 여섯병이 배달되자마자 커터 칼을 들고 라벨을 한꺼번에 떼어둘 것,

이 5분의 수고로 분리 배출할 때의 귀찮음이 대폭 감소할 것이다.

영혼이 리셋된 듯 부지런해지자는 원대한 계획은 감히 품지도 않는다.

그저 평소보다 5%만 에너지를 더 쓰자고 다짐해본다.

말하자마녀 '음식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것'은 5%의 노력으론 턱도 없다.

부른 배만큼 커진 중력을 거스르며 일어나 싱크대 앞에 서려면 초인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릇들을 싱크대에 가져가 물이라도 부어두는 것은 5%의 노력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 행위를 하지 않으면 후에 기름때가 말라붙을 그릇을 설거지하며 이를 갈게 되고 말이다.

여전히 나의 몸은 습관적으로 퍼지고 늘어지려 한다.

그럴 때마다 신년 목표를 되새기며 5%의 에너지를 짜내 본다.

외출했다 돌아와 겉옷을 아무데나 부려두지 않고 옷장에 걸어두고, 요리를 위해 양파를 까며 한두개를 더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책을 읽다 좋은 착상을 하면 머릿속에 흩뿌려두다 증발시키지 않고 핸드폰에 손을 뻗어 메모해둔다.

이 5%의 자투리 노력들이 야금야금 모여 하루를 100% 바꿀 날을 꿈꾸며 말이다.

 

때로는,

변화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작은 일부분에서 시작하곤 한다.

2021년....이 한 해,

완벽해지려는 삶, 하루를 위해....나도 5분 일찍, 5%의 노력에 도전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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