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가족끼리 주고받는 말이 평등하다. 문제는 나다. 가부장제의 묵은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한 나는, ‘가장’으로의 지위를 탈환하려는 저항을 간헐적으로 시도하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엄마와 딸이 티격태격할 때(그들은 자신들의 언쟁을 ‘대화’라고 한다), 나는 옆에서 조용히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시끄럽다며 소리를 빽 지른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딸이 곧바로 엄마와 공동전선을 펼치며 하시는 말씀이 “엄마, 그만하자. 아빠, 또 성질낸다.”
분연히 떨쳐 일어난 항거에 대해 ‘화낸다’ 정도면 좋으련만 ‘성질낸다’ 또는 ‘짜증낸다’고만 하니, 나의 의분은 앉은자리에서 하찮은 게 되고 나의 행위는 대화할 줄 모르는 ‘개저씨’의 옹절함으로 바뀐다.
그에 비해 ‘격노’는 얼마나 격조 높은 말인가. 내 감정도 비슷했는데, 왜 나한텐 이 말을 해 주지 않는가. 사전 뜻풀이엔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름’ 또는 ‘몹시 화를 냄’이라고 되어 있던데,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다. 아이는 아무리 분하고 섭섭해도 격노할 수 없다. 격노는 나이 든 사람의 전유물. 그렇긴 하다. 나이 들수록 노기 떨일이 많으니. 하지만 어르신들이 그런 감정을 자주 표출하낟고 해서 격노의 주체가 어르신이기만 하겠는가.
예컨대, 이십 대의 사장이 성질을 버럭 낸다면, 예의 바른 직원들은 회의실을 나서며 ‘사장님께서 격노하셨다’고 전할 거다. 그렇다면 격노의 자격은 나이가 아니라 권력의 소유 여부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일시적인 것. 누구든 잠시 잠깐의 권력이 회수된 다음엔, 같은 행동에 대해 ‘격노‘는커녕 기껏해야 ‘또 성질낸다’는 면박이나 당할 거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 경희대 교수
요즘, 어떤 분때문에 이 ‘격노’가 유행어가 된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또는 어떤 사안에 대해 ‘격노’할 만한 자격을 갖췄는가? ‘격노’도 내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하심이 아니면 그건 ‘히스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