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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말글살이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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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5일 금요일 한겨레 22면 하단

 

내 방은 왜 이리 어지러운 건가? 오늘도 책 한 권을 찾느라 반나절을 보냈다. 남들은 정리정돈을 잘만 하던데, 내 방은 책 위에 책이, 책 뒤에 책이, 층층이, 칸칸이,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언젠가 읽겠다며 사 모은 철학, 교육, 사회, 예술, 문학책들이 전공책들과 함께 뒤엉켜 있다. 거기에 지난주 회의 자료와 주전부리, 세 갈래로 쪼개진 거울, 탑이 된 과제물들, 수북이 쌓인 볼펜과 우산 몇 자루, 낡은 온풍기,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들. ('기타' 잡동사니가 '나'의 습성을 말해준다.)

 이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분류하고 모두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라만상을 어찌 인간적 기준으로 완벽하게 구획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열거하기 어려우면 '그 밖', '그 외', '나머지'란 뜻으로 '기타'를 쓴다. 세상은 늘 '기타'가 있기 마련. 질환에도 '기타'질환이, 국가도 '기타'국가가, 안건도 '기타' 안건이, 업무도 '기타' 업무가 있다. 손에 잡히지도 구획선 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자투리, 잡스럽고 주변적이고 사소하며 불온한 얼룩이 묻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기타'에 '다르다' '남'이란 뜻의 '타'(他)란 글자가 있는지 모른다. '기타'는 '우리'에 속하지 않는 '타자'(他者,other)가 우리 옆에 늘 함께 있음을 알게 만드는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이다. 장애인, 소수자, 이방인, 그리고 말 못 하는 자연. 기타를 업신여기지 말라.

 (다행히 책을 찾았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가장 나중엔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몫을 주는 것이 이 세상 경제 원리여야 한다는 예수의 비유를 풀어 쓴 혁명적 책. 경제학계에선 '기타'책이다. 좋은 정치는 '기타' 취급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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